▲정치 드라마 <어셈블리>의 한 장면. |
“국민이 국민의 의무를 다했을 때는 국가가 의무고, 국민이 권리입니다.”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진상필 의원(정재영)이 온 몸으로 토해낸 연설이다. 진상필의 연설은 <변호인>의 송우석(송강호)이 공안세력을 향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외치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어쩌면 진상필과 송우석 두 캐릭터의 공통분모는 ‘노무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송우석이 80년대 대표적인 공안사건이던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인권변호사 노무현이라면, 진상필은 영남과 호남의 지역갈등을 ‘붙이려’ 했고, 얄팍한 정치공학보다 정치가 구현해야 할 본연의 가치를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기득권마저도 과감하게 내던지려 했던 정치인 노무현이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제작의도가 세상을 떠난 정치인을 추억하는 데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 이 드라마는 국회의원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일깨운다. 또 법안이 발의되고 최종 입법으로 확정되는 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주기도 한다.
영어로 국회의원은 ‘law maker,’ 즉, 법을 만드는 사람을 의미한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 용접공이었던 진상필은 국회의원 본연의 사명에 눈을 뜬다. 용접 노동자가 금배지 달고 국회 가서 현실 정치에 눈을 뜨고, 그 다른 무엇보다 의원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깨달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은 실로 감동적이다.
진상필 역을 맡은 정재영의 연기는 신들린 듯하다. 그는 <실미도>, <글러브>, <방황하는 칼날>, <플랜맨> 등 그간 출연한 영화에서 겉으로는 ‘까칠’하면서도 순수한 심성을 지닌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그런 그에게 카랑카랑한 어조로 국민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스럽게 긁어주는 진상필 역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정재영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어셈블리>는 평범한 정치 드라마로 머물렀으리라는 생각이다.
관전 포인트는 또 있다. 집권여당인 국민당의 백도현 사무총장(장현성)이다. 백도현은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차차기 대권을 넘보는 유력 정치가다. 그런데 진상필이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과정과 비례해 백 총장은 타락일로를 걷는다. 진상필이 정치가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일깨운다면, 백도현은 정치권력이 한 인간을 어디까지 타락시킬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셈이다.
야심만만한 백 총장은 경제시에 눈독을 들인다. 현역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공석이 된 경제시에 진상필을 전략 공천한 것도 경제시에 무혈입성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만만하게만 봤던 진상필이 보좌관 최인경(송윤아)의 지원을 받으면서 무섭게 커나가자 백도현은 위기감을 느낀다. 이에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상필을 밟으려는데 혈안이 된다. 후배이자 동지였던 최인경은 그런 그를 보며 안타까워한다. 그럼에도 그는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난 지금보다 더 바닥으로 떨어질 준비가 돼 있어”라고 내뱉고 최인경을 뿌리친다.
백도현의 야비함은 진상필이 발의한 ‘배달수법’을 저지하려는 데서 극에 이른다. 원래 배달수법의 기본 취지는 ‘패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자’는 것인데, 그 아이디어는 백도현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백도현은 진상필을 밟는 데만 사로잡혀 초심을 잃고 만다. 그래서 진상필이 배달수법을 발의하자 ‘배달수는 없다’며 역공에 나서고, 그마저도 되지 않자 급기야 대통령을 향해 거부권 행사를 압박하고 나선다.
드라마가 폭로한 여의도 정치
▲정치 드라마 <어셈블리>의 한 장면. |
드라마의 진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특히 여의도 정치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서 빛을 발한다.
진상필은 국회에 입성했어도 해고 노동자 시절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장마로 인해 다리가 끊겨 노인정에 가기 힘들어진 한국전쟁 참전용사 할아버지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다리를 놓아 주는가 하면 보좌관 김규한(옥택연) 또래의 20대 청년들이 취업난에 허덕이는 걸 알고 이들의 어려움을 덜어 줄 법안을 만들려 한다. 그뿐만 아니다. 대통령이 흠결 투성이의 총리 후보자를 내세우자 무려 14시간 동안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를 하며 끝내 총리 인준을 무산시킨다.
소속당인 국민당은 물론 야당마저 그를 못 마땅해 한다. 여당은 친청과 반청계로 반목하면서 계파 이익추구에만 몰두할 뿐 국회의원이 진짜로 돌봐야 할 민생은 안중에도 없다. 야당은 야당대로 자신들의 이해득실 계산에 급급하다. 진상필이 감동을 주는 건, 이 모든 얄팍한 정치공학을 초월해 진짜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배달수법 통과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현역 국회의원들이 보고 반성해야 하는 장면이다.
진상필은 배달수법 통과에 정치생명을 건다. 이러자 여당은 딴지를 걸고 대통령도 거부권을 행사한다. 그럼에도 진상필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 야당의 도움을 얻기 위해 야당 총재 집 앞에서 풍찬노숙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무릎까지 꿇는다.
지금 여의도 정치를 보라. 여야를 막론하고 대학 공부를 마친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연애·결혼 등을 모조리 포기하든, 노동자들이 땅 위에 발붙일 곳이 없어 고공농성을 벌이든 관심이 없다. 심지어 여당 대표라는 자가 “노조가 쇠파이프만 휘두르지 않았다면 국민소득 3만 불 됐을 것”이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건 계파정치다. 진상필이 순수한 의도로 법안을 발의해도 계파 간 이해관계의 벽에 막혀 좌절하기 일쑤다. 말하자면 여의도 정치 환경은 국민만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 정치인이 전국적인 지지도를 얻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언론은 진짜로 국민을 위한 법안을 발의하는 의원을 발굴하고 그에게 힘을 실어주기보다, 스포츠 경기 중계하듯 계파 간 갈등이나 정치인의 비리로만 온 지면을 덮어 버린다. 어느 의원이 어떤 법안을 발의했는지, 그 법안이 국민 개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그러다보니 우리 정치판에서는 5선을 기록했음에도 이렇다 할 법안 하나 발의한 적 없는 의원이 대통령에 오르는 진풍경도 가능한 것이다.
요약하면, 여의도 정치는 진상필보다 백도현이 성공하는 구조다. 여의도에 계신 높으신 분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비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어셈블리>는 이런 정치환경을 바꿀 단초를 시청자들에게 알려준다. 진상필은 당선되자마자 큰 슬픔에 빠진다. 그의 평생의 멘토였던 배달수가 실족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러자 진상필은 충격에 빠져 잠적한다. 최인경 보좌관은 실의에 빠진 그를 찾아가 이렇게 설득한다.
“지옥 같은 세상을 신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구원하려고 만들어진 게 정치입니다.”
정치는 인간 삶 그 자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치는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문제는 정치의 주체인 인간이 어떻게 운영해 나가냐다. 현실 정치가 더럽다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진상필 같은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국회에 보내면 된다. 죄다 나쁜 사람들뿐이라면 그 중에 덜 나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방법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결말은 무척 시사적이다. 최인경은 “정치는 크든 작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라는 신념에 차 있다. 그래서 백도현에게 당돌하게 전화를 걸어 경제시 전략공천을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비록 그의 제안은 거절당했지만 진상필에게서 깨끗한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얻는다.
드라마는 그가 국회에 입성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가 국회에서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 갈지, 또 계파 간 합종연횡이 횡행하는 정치현실에서 자신의 꿈을 어떻게 펼쳐 나갈지 사뭇 궁금하다.
이쯤 되면 <어셈블리> 시즌2를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