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
난민의 문제로 세계가 들끓고 있다. 각종 매체들은 연일 난민에 관한 뉴스를 보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파도에 밀려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배기 어린 아기의 시체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시리아 난민인 아기의 아빠는 다섯 살과 세 살짜리 두 아이를 안은 채 뱃전에 매달려야 했다. 두 아이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아빠는 사력을 다해 물 위로 들어 올렸으나 끊임없이 넘실거리는 파도는 결국 작은 아기의 숨을 삼켜버렸다. 이 아기의 이름은 아일린 쿠르디이다. “아빠, 제발 죽지 말아요.” 아기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오래 전 영국유학시절의 일이다. 저녁 TV뉴스의 한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뉴스는 런던 워털루역의 선로에 설치된 CCTV에 녹화된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자 그날 오후 파리에서 도착한 고속열차의 밑바닥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더니 어둠 속으로 도망쳐 사라지는 영상이었다. 그 사람들은 파리에서 출발하여 도버해협 아래로 뚫린 해저터널을 시속 약 30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는 고속열차의 밑바닥에 몸을 숨기고 그야말로 목숨 건 탈주를 시도한 난민들이었다. ‘설마~’ 하시는 독자를 위해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설명하자면, 그들은 객차 안에 숨은 것이 아니고, 고속열차의 밑바닥 기계장치 틈새에 적당히 몸을 매달고 온 것이었다. 그들의 여행이 과연 어떠했는가를 상상해보면 현기증이 느껴진다. 돌멩이로 덮인 선로 바닥으로부터 불과 수십 센티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열차 밑에 매달려 시속 수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린다고 생각해보라. 팔다리를 잘못 움직여 몸의 한부분이 땅바닥과 조금만 스쳐도 아마 그들의 몸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부서질 것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공포를 무릅쓰고 이동하게 하는가?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다른 루트를 통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또 다른 사람들의 모험은 결국 비극적인 현실이 되고 말았다. 칼레와 도버를 운행하는 화물선의 컨테이너 속에 몰래 숨어서 탈주를 감행하던 수십 명의 불법 이주민들이 질식사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과연 이들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야 했던가?
이들은 난민 또는 이주민들이다. 이들의 목숨 건 탈주는 오늘날 지구화의 어두운 그림자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구화는 두 가지 현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교통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 모든 나라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고 다양한 종교전통과 문화권이 서로 접촉하는 현상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가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고 전 세계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강화되는 현상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난민이 생기고,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경제는 자본과 노동의 결합을 통해 형성된다. 그런데 자본은 아무런 제약 없이 세계 어느 곳이나 들어가 이윤을 창출하면서 본국으로 부를 집중하고 있는 반면, 노동은 국경이란 울타리에 갇혀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해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국제정치질서로 인한 전쟁이 계속되는 이 시대가 지속되는 한, 가난과 내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탈주를 감행하는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앞으로도 더욱 확대될 것이다. 하나의 비현실적인 제안이겠지만 난민 현상을 없애려면 강대국의 간섭에 의한 내전이 종식되고, 국제간 부채를 탕감해 주며, 부자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자동차나 전자제품 등을 팔아 얻는 이윤의 일부를 돌려줌으로써 가난한 나라에도 일자리가 생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시리아 난민 약 700여명이 한국에 난민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지자 찬반양론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어느 정도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문화와 종교가 우리와 전혀 다른 난민들을 수용하면 앞으로 여러 가지 갈등과 사회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고 반대한다. 이에 더하여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들이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며 사는 아람 사람이었는데 그가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신명 26장 5절, –현대인의 성경)”
구약성서는 주로 나그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모두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그들의 삶은 항상 불안정했으며 고단하였다. 언제나 남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남의 땅에 빌붙어 비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잠시 눈을 돌려 우리의 역사를 생각해보자. 지난 20세기 초 전 세계가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을 때, 우리의 선조들도 정든 고향을 등지고 난민이 되어야 했다. 괴나리봇짐을 메고 간도와 연해주, 일본과 하와이를 향해 기약 없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나그네는 어쩔 수없이 현지인과 다른 문화와 종교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해외 어디를 가도 김치와 된장찌개를 먹어야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들의 종교와 문화를 조건에 포함시키지 않으셨다. 다만 이들의 처지를 말씀하셨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들에게 해준 것이 곧 예수님 자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은 난민이 바로 우리가 환대해야할 오늘날의 예수님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때 왕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물려받아라.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맞아들였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간호해주었으며 갇혔을 때 찾아 주었다’고 말할 것이다. (마태 25장 34-3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