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중문화 리뷰] 약물로 이룬 암 극복 신화

스티븐 프리어스 연출 <챔피언 프로그램>

▲영화 <챔피언 프로그램>의 한 장면. ⓒ스틸컷

랜스 암스트롱은 그야말로 신화였다. 고환암을 이겨내고 평생에 한 번 우승하기도 어렵다는 ‘투르 드 프랑스’를 일곱 번이나 제패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적어도 약물 복용이 적발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스티븐 프리어스가 연출한 신작 <챔피언 프로그램>(원제: The Program)은 성공신화의 추악한 이면을 폭로한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랜스 암스트롱이 약물에 손 댄 이유에 대해 의아해 했다. 모든 운동선수는 1등을 꿈꾼다. 암스트롱이 약물에 손 댄 이유 역시 1등을 차지하고 싶어서였다.  
영화는 이런 일그러진 성공 욕망을 생생히 묘사한다. 랜스 암스트롱(벤 포스터)은 원래 단거리 선수였다. 그런 그가 총 3,500km를 달려야 하는 ‘투르 드 프랑스’에 도전한다. 첫 도전은 실패로 끝난다. 이러자 곧장 ‘에포’라는 약물에 손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곧 부작용이 생겼고, 결국 고환암 선고를 받게 된다. 항암 치료 과정에서 담당 의사에게 다양한 약물을 복용한 사실도 털어 놓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구심은 가시지 않았다. 약물은 선수를 금방 망가뜨린다. 1988년 서울올림픽 육상 여자 100m·200m·400m 계주 등에서 금메달을 거머쥐며 3관왕에 오른 미국의 그리피스 조이너는 1998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하자 경기력 향상을 위해 정기적으로 근육강화제를 맞았다는 의혹이 일었다. 그의 사망원인을 놓고 여전히 논란이 무성하지만, 관계자들은 약물이 그의 생명을 단축시켰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더구나 암스트롱은 엄청난 체력을 요하는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해야 했다. 그가 무분별하게 약물을 복용했다면 어떤 후유증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었다. 
영화는 중반부쯤에서 이런 근본적인 의문을 해소시켜준다. 그가 상습적으로 약물을 투여했음에도 건재했던 이유는 의학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고환암에서 회복 중이던 암스트롱은 이탈리아 출신 미셸 페라라(귀욤 카네)를 찾아간다. 미셸은 신념 강한 의사다. 그의 신념이란 엄격하게 관리만 이뤄진다면 약물이 선수의 건강에 해를 미치지 않으면서 경기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암스트롱은 그의 주장에 솔깃해 재활을 의뢰하고, 미셸은 자신의 의학지식을 총 동원해 암스트롱을 사이클 기계로 키워낸다.   
▲영화 <챔피언 프로그램>의 한 장면. ⓒ스틸컷

암스트롱은 선수생활 동안 거의 600회에 이르는 도핑 테스트를 받았다. 그러나 적발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셸이 적발되지 않는 방법을 알려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암스트롱의 성공신화는 선수의 일그러진 욕망과 여기에 기생하는 의사가 공모한 합작품인 셈이다.   
집착은 언론인으로서 당연한 의무 
영화는 또 하나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바로 언론의 역할이다. 암스트롱의 약물 스캔들은 영국 <선데이 타임스> 소속 저널리스트 데이빗 월시(크리스 오다우드)에 의해 꼬리가 밟혔다. 그런데 그가 암스트롱을 미행했다든지, 휴대전화를 도청해서 단서를 잡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TV를 통해 암스트롱의 경기력이 고환암을 앓기 이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는 데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합리적 의심을 가졌다는 의미다. 객관적인 기록은 합리적 의심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그는 이때부터 약물복용 의혹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동료기자들은 왜 그토록 집착하냐며 핀잔을 준다. 그는 쏟아지는 핀잔에 이렇게 일침을 놓는다.   
“아니, 언론인이 집착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     
월시가 암스트롱에게 집착하는 정도가 심해지자 동료기자들은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동료들은 암스트롱이라는 유력한 취재원을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월시는 마침내 암스트롱의 약물 의혹을 기사화하는데 성공한다.     
암스트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먼저 기자회견을 자청해 모든 의혹을 강력히 부인한다. 또 약물 의혹을 제기하는 모든 이들을 전방위로 압박한다. 이런 모습은 암스트롱이 스포츠맨십과 거리가 먼 인물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는 마초적인 성향도 강했던 것 같다. 그는 경기 도중 틈이 생기자 팀 동료들과 약물을 복용한다. 이때 한 동료가 그의 성공 신화를 그린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라면서 제이크 질렌할이 암스트롱 역을 맡을 것이라 말한다. 이러자 암스트롱은 비아냥이 섞인 어조로 이렇게 대답한다.
“제이크 게이렌할?”
▲영화 <챔피언 프로그램>의 한 장면. ⓒ스틸컷

이 대사는 배우 제이크 질렌할(Jake Gyllenhaal)이 동성간의 사랑을 그린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게이(Gay)라고 비꼰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레이스 도중 다른 선수를 협박하는가 하면, 자신과 한 팀에서 뛴 선수를 실컷 이용만 하다 내치듯 내보내기도 한다. 더욱 심각한 건, 그가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선수들까지 약물에 손대게 부추겼다는 점이다.   
플로이드 랜디스는 암스트롱에게 이용당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암스트롱과 함께 뛰는 동안 상습적으로 약물을 복용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도 약물 의혹이 제기되자 암스트롱에게 피신하려 한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매몰차게 거절했고, 이에 그는 모든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의혹은 월시가 제기했지만 플로이드 랜디스가 아니었다면 암스트롱의 약물은 영영 성역으로 남았을 것이다.    
스포츠 선수들의 약물 복용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육상 100m 달리기 종목에 출전한 캐나다 벤 존슨은 경쟁자인 미국의 칼 루이스를 이기기 위해 금지 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복용했었다. 그는 처음엔 주최 측의 안전 소홀 문제를 건드리며 강력하게 부인하다가 끝내 도핑 결과를 인정했다.   
그의 약물 복용은 전 세계 스포츠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스캔들로 남았다. 약물 스캔들은 우리에게도 새삼스럽지 않다. 우리나라 수영선수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수영 400m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박태환 선수는 도핑에 적발돼 국가대표 자격마저 잃는 아픔을 겪었으니 말이다.   
약물 스캔들 이후 25년이 지난 2013년, 벤 존슨은 서울 잠실주경기장 트랙을 질주했다. 선수로서가 아니라 약물 근절 홍보대사 자격으로였다. 같은 해 암스트롱은 미국의 유명 TV토크쇼인 <오프라 윈프리쇼>에 출연해 약물 복용사실을 시인했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고해성사라고 했다. 이런 사과에도 그의 약물 스캔들이 일으킨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전망이다. 그가 벤 존슨처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의 레이스를 벌일지 지켜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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