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현 교수(연세대/종교철학) ⓒ베리타스 DB |
제 1부
0. 종교간 관계 분석을 위한 틀(2)
바로 앞에 그려놓은 표에서 우리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시대 흐름에 따른 역사관의 차이가 종교 관계유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역사에 대해 고,중세에는 비관주의가 지배적이라면 근세는 낙관주의를 절정으로까지 끌고 간 시대라 하겠고, 이에 비해 현대는 중심적이고 일방적인 비관이나 낙관을 거부하는 현실주의를 채택합니다. 그리고 시대에 따른 각 역사관이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종교관계유형에 상응합니다. 왜, 어떻게 그리 되었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효과적인 분석을 위해 각 시대가 선(善)과 악(惡)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를 살피는 것이 좋은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각 시대에서 악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요? 고중세의 역사 비관주의에서 악은 ‘선의 결여 내지는 파괴’로 새겨졌습니다. 태초의 온전한 선이 역사 과정에서 점차로 일그러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악으로 표상되는 다름을 배제하려고 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근세의 역사 낙관주의에서 악을 겪을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역사과정은 선의 완성을 향해가니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겪는 악으로 표상되는 다름은 선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포함됩니다. 당연히 악은 ‘선의 미완성’입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현실주의에서는 ‘선과 악의 공존 또는 혼재’를 말합니다. 같음과 다름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지요. 현실에 좀 더 주목하고 보니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봅시다. 고중세는 왜 역사를 비관적으로 보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사실상 신중심주의로부터 예견된 것입니다. 신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관인데 어떻게 비관주의로 빠질까 의아해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아니라 신중심주의가 초래한 불가피한 결과입니다. 이 시대의 세계관에 의하면 신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이와 함께 완전한 선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를 겪습니다. 그런데 신중심주의에 따르면 신에 의해서 예정되어 있다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니 벌어지는 현실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그 ‘원인’인 과거로 거슬러 가면서 현실을 거기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보게 되는 인과율적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살 때는 문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보인다는 것은 삶을 문제들을 겪어가는 과정으로 본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문제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신적인 원인과 세계의 결과라는 틀에 현실을 집어넣고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이미 정해진 운명 같은 힘이 작동하는데 문제를 겪는 삶의 과정은 이를 비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겠지요. 태어났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태생의 운명이 영주의 자식과 노예의 자식으로 갈라놓습니다. 영주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운명을 예찬하고 노예는 운명을 저주합니다. 인과율은 삶의 운명을 어찌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 숙명으로 새기게 합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거나 이를 개탄하거나 결국 문제가 점차로 더 커져가는 세계와 역사로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관주의는 이렇게 해서 엮어진 것이라 봅니다.
비관주의에서 보면 역사의 진행은 태초의 선이 깨어져가는 과정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1,2장까지는 온전한 선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3장 이후부터는 내내 타락입니다. 왜 그럴까요? 경전이라 해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볼 일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상황에서 중요했던 것은 ‘선한 창조’를 고백하기보다는 ‘타락’을 고발하는 데에 더욱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구원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그러나 창세기 50장 중에서 창조기사는 2장밖에 안 되고 계속해서 끝까지 타락 이야기입니다. 역사가 진행될수록 선은 파괴되어 갑니다. 창조에서는 온전한 선이었는데 타락의 과정에서 악이 점차로 늘어나면서 선이 파괴되었으니 비관적인 역사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역사가 흘러가면서 선을 파괴해가는 다른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배타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자연의 지평에서 신중심주의는 이미 신 아닌 모든 것들은 ‘선을 갉아먹는 것들’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근세로 눈을 돌려봅시다. 이제 과학 덕분에 초자연을 더 위로 올려버리고 자연이라는 지평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당연하게도 인간이 신 대신에 중심에 자리합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성적 주체의 자유를 예찬합니다. 여기서 신의 창조는 선의 가능성만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주체이고 중심이 된 인간이 가능성으로만 심겨진 선을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발전하면서 선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선의 완성을 ‘목적’으로 지향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낙관주의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구도에서 악은 무엇일까요? 창조단계에서 가능성으로 심겨진 선이 역사 현실에서 점차로 이루어져 가는데 이 과정에서 아직 선이 덜 이루어진 만큼 악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악은 선의 미완성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악도 선의 완성을 위해 거쳐야 하는 ‘수단’이 됩니다. 완성을 향해 가는 데에 이바지할 것이 기대됩니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아직 겪어보지 못한 다름들은 나름대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니 다름들을 싸안을 근거를 갖게 되며 이런 이유로 이른바 ‘포괄주의’의 근거와 배경이 됩니다.
그렇다면, 현대는? 시작의 온전성을 강조하는 고중세나 끝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근세와는 달리 현대는 그런 그림 자체를 그리지 않습니다. 현실은 선과 악이 너무나도 혼란스럽게 뒤범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뒤범벅이라는 것도 선악판단이 가능하다는 전제에서나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 선악이 뒤바뀔 수도 있는 현실에 대한 체험이 축적되고 이에 대해 곱씹을 수밖에 없는 현대는 한쪽 손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중심주의로 세계를 보거나 그렇게 역사를 읽어낼 수 없을뿐더러 그것이 인간뿐 아니라 신에게조차 부적절하고 오히려 왜곡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불가피하게 탈중심주의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도 이게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중심주의야말로 신성모독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제 탈중심주의가 가리키는 상호상대성은 역사에서 선악의 줄다리기가 만만치 않게 엮어지고 있음을 보게 했습니다. 앞서 신중심주의구도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세계를 보고 역사를 읽으니 인과율의 이데올로기에 눌려 비관주의로 흐르고, 인간중심주의구도에서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보니 목적론의 유토피아를 따라 낙관주의로 치달아갔다면, 이제 현대는 역사를 그렇게 짜 맞추어 보는 태도가 사실은 역사의 범주를 벗어난 초역사적인 이념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는 현실을 대면하려는 태도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다원주의의 세계관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 확연하게 알고 있는 같음이 아니라 알 수 없기도 한 다름들이라는 것을 홀연하게 발견하게 된 현대인들은 그러한 주제파악의 눈으로 선과 악의 관계를 보고, 또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야 한다는 것을 과제로 부여받고 있습니다. 솔직히 보건대, 남을 살필 것도 없이 나 자신이 이미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 나 자신 안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 자신이 이미 그런 뒤범벅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혼자 옳다는 독단이나 혼자 착하다는 독선은 종교적 차원은 물론이거니와 윤리적인 판단은 고사하고 상식적인 견지에서도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신실한 종교인들에게서, 그리고 깔끔한 도덕주의자들에게서, 아직도 팽배하고 있으니 이건 세계관이나 역사관을 들이댈 것도 없이 주제파악의 결여에 의한 자기도취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간단하게나마 역사에 대한 이해가 시대별로 그토록 다르다는 것을 살폈습니다. 특히 선과 악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이 밀고 당기는 긴장이 역사관을 그렇게 엮어낸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다름에 대해서 같음이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결정하는 구도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종교간 관계유형을 그렇게 추려내도록 한 근거와 배경이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러기에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로 표현되는 관계유형이 그저 종교들 사이에만 적용되고 마는 틀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시대의 역사와 사상, 문화로부터 추려진 틀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면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야기를 한 마디 더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려는 한 마디는 꽤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정말 정직하고 진지하게 더불어 생각하고 돌이켜보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사실 세계의 작동원리를 인과율로 보고 이에 따라 역사를 비관주의로 엮어내는 관점이나 이와는 달리 세계가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의 관점에 근거하여 역사낙관주의를 귀결시키는 입장은 겉보기에는 매우 대조적이지만 사실 그 대조 이상으로 공통적인 전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세계의 운행원리나 방식에 대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기본구도로 하여 보는 태도나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보는 태도는 공히 신의 인격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신중심주의가 지배하던 고중세 시대에는 신이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관계를 책임지고 관장하며 운행하신다는 관점에서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이에 앞선 신적인 원인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살면서 당하는 고통은 앞선 원인으로서의 죄에 대한 벌이라든지 또는 앞서 쌓아놓은 악업에 대한 대가라는 관념이 바로 이에 대한 좋은 증거입니다. 어떠한 원인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반드시 따르도록 도덕적 판단에 근거한 인격적 관리의 방식으로 신이 세계를 운행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근세로 넘어와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인간중심주의가 지배하던 근세에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선한 목적의 완성을 위해 심지어 이와 모순될 수도 있는 수단들이 취해지지만 이 모두는 그러한 좋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인데 이는 바로 인격적인 신이 이 모든 과정을 섭리하고 관장하며 결국 궁극적으로 목적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과율이나 목적론 모두 세계를 인격적인 신의 섭리 안에 포함시키면서 그 적용범위를 확장하고자 했으니 세계관은 그렇게 대조적으로 달라도 그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관들은 나름대로의 그만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좀 더 깊이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조신앙은 하느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온 우주를 다 살피지는 못해도 지구만이라도 봅시다. 물론 현대과학이 아직도 지구를 완전히 파악하거나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이야기를 위해서는 충분합니다. 이 지구라는 자연세계에는 인격성 뿐 아니라 비인격성도 있고 무인격성도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행위는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그 밥을 뺏어 먹는 것은 비인격적인 행위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밥을 먹는 행위는 인격적(personal)이지도 않고 비인격적(impersonal)이지도 않으니 무인격적(apersonal)이라고 해야 합니다. 지구는 이런 것들로 차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自然)이라고 하면 ‘스스로 그러한’ 것이니 무인격성이 가장 커 보입니다. 우리 눈에는 매정할 정도로 무심하지만 사실 사심이 없는 것이겠지요. 지구가 만일 사심으로 운행된다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살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사람들이 무리지어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노닐다가 낭떠러지의 절벽 앞에서 그만 발을 헛디뎌 떨어졌습니다. 만일 지구가 도덕적 판단을 한다면 이런 상황은 포상과 징벌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지요. 말하자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더라도 선한 사람은 사뿐하게 받아내고 악인은 내동댕이치다시피 박살내버리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다면 과연 좋을까요? 만일 지구가 그렇게 사심으로 움직인다면 우리 인간은 너무도 불안하여 꼼짝달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판단을 받을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해도 착각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만일 이랬다면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으니 어떤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자연은 이미 스스로 그러해서 무심코 자연법칙을 행사할 뿐입니다. 어떤 도덕적 판단과 같은 인격적 행위를 하기보다는 그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필연적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따라서 자연현상이 그렇게 일어날 뿐입니다. 그런데 자연의 맹목적 필연성,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터전입니다. 창조주께서는 비록 제한된 범위일지언정 우리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그렇게 맹목적 필연성의 자연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맹목적 필연성은 무인격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피조세계인 자연이 그렇게 무인격적이라면 하느님의 창조섭리 안에 이미 그러한 요소가 들어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원리에 있지 않은 것이 피조세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더욱이 무인격성과 같은 가치중립적인 성질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다만 피조세계와의 관계에서 창조주 하느님이 관계하시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앞서 하느님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이며 그저 고정불변의 존재라기보다도 현실에서 역사하시는 행위이고 사건으로 새겨야 한다고 한 이야기가 이 대목에 연관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역사하시는 행위에 인간의 자유를 위한 자연의 맹목적 필연성을 가리키는 무인격적 차원이 있음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이고 피조세계의 질서이며 인간 삶의 자리가 그러하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작년 4월 온 국민을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었던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교회 안에서 여지없이 ‘하느님이 세월호를 빠뜨리셨다’는 발언이 마구 튀어나왔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벌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하느님이 세월호를 빠뜨리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죄로 인하여 한국이라는 배가 침몰해야 마땅하지만 이를 막기 위해서 작은 배를 빠뜨리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세월호를 하느님이 빠뜨리셨나요? 하느님이 참새 한 마리도 허락 없이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우리 머리카락도 다 세고 계시다는 말씀을 근거로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느님이 우주의 창조주로서 모든 것을 관심하고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권세도, 심지어 죽음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보다 힘으로 눈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다 인격적으로 관장하시며 또한 하느님이 하시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구약성서의 그 많은 선지자들이 고통의 현실에 대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어서 그저 절규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을 다 알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우리 마음대로 헤아리는 데에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일어난 모든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이 개입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잘 모시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인간이 하느님을 지배하고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이 무고한 생명을 몰살시키는 악마가 되어버립니다. 우리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인격성으로 하느님을 다 싸잡으려하니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인격성의 폭력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찌하여 그 많은 목사들과 신자들이 이와 같은 착각과 강박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악마로 그려내고 있습니까? 그리고는 그게 무슨 대단하게 의로운 확신인 줄로 알고 희생당한 넋들과 그 유가족들의 가슴에 그렇게 대못을 박습니까? 이게 같은 인간으로 할 짓입니까? 바로 이런 모습들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것이 아닙니까? 옳은 생각인데 차마 희생자와 가족 앞에서 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잘못된, 아니 하느님을 모독하고 인간을 능멸하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을 인격성으로만 재단하는 것은 하느님을 ‘아주 큰 인간’으로 보는 것으로서 결국 의인화의 우상일 뿐 아니라 아주 사악하게 왜곡된 고정관념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인격성의 관점이 세계의 운행을 인과율적으로 보거나 목적론적으로 보는 관점을 관통하여 흐르면서 폭력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이를 넘어서야만 합니다. 이제 인격성의 폭력을 종식시켜야 합니다. 다 안다는 착각이, 다 알아야 한다는 강박이 신의 인격성을 붙들고 늘어지게 하지만 이건 착각이나 강박과 같은 자가당착을 넘어서 신성모독입니다. 하느님은 인격성으로 재단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신인동형론이나 의인화의 혐의라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입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고 비인격적인 폭력입니다. 신에 대해 인격성으로 모두 설명하려 하면서 비인격적 폭력이 저질러지는 것입니다. 자가당착입니다. 구약성서의 많은 선지자들도 이런 상황을 구차하고 황당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 따지고 떼쓰고 항거했습니다. 오히려 무인격성에 대한 절규라고나 할까요? 사실 성서만 착실히 잘 읽어도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적절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망발들이 쏟아졌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해서 우리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다시금 곱씹고 매만져야 할 뿐 아니라 이와 밀접하게 얽혀있는 종교관계유형에 대한 진단과 평가도 이러한 연관구도 안에서 비로소 맞갖게 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