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베리타스 DB |
앞서 살펴본 대로, ‘인간’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종교의 문제들을 아무리 심도 있게 논해도 그 뿌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종교의 문제를 인간과 떼어 놓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가 표방하는 절대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경향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대체로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우리는 종교의 원론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이상적이고 원리적인 이야기만 하니 그럴 듯 해보이기는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위나 정오를 판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종교에 대한 많은 논의가 공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을 덮어놓고 종교만 살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종교와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없었다면 종교도 없었을 것이라는 통찰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음이 종교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해 되씹고 넘어서려는 성정이 초월을 지향하게 되니 이를 일컬어 종교성이라 하고 그래서 인간은 일찍이 ‘종교적 인간’이 되었던 것이지요. 물론 여기서 핵심은 초월 또는 무한으로 그려지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런 힘을 추구하다가 급기야 숭배하게 되면서 종교성이 엮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인간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관련하여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앞서 살핀 대로, 교회-그리스도교-성서-하나님이라는 일련의 관계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교회보다도 작지만 교회 밖에서 더 많이 살고 있고, 그리스도교에서 자기정체성을 꾸리지만 그것은 일부분에 불과하며, 성서 안에 등장하지만 성서를 이루는 요소이기도 할 만큼 엎치락뒤치락하고 오락가락합니다. 그런데 이런 실상을 외면하면 마치 인간은 전혀 없는 듯이 이 일련의 관계가 거기에 그렇게 하나로 뭉쳐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힘을 추구하고 숭배하는 인간이 엄연히 중심적인 기준으로 버티고 있는데도 그런 줄 모르면서 교회와 그리스도교와 성서와 하나님이 모두 같다고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같은 것은 이를 관통하는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은 이토록 집요하게 종교와 구조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힘을 추구하다가 숭배하면서 ‘종교적 인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적 인간’이라고 해도 추상적인 개념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개념으로서의 ‘종교적 인간’이 아니라 타자와도 그렇게 다르다고 주장하는 자기가 그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기가 소속된 교회이고, 그런 자기정체성을 꾸리는 그리스도교이며 그런 자기가 읽는 대로의 성경이고 그런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나님이니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복하건대, 같은 이유는 이 모두에 철저하게 그런 자기가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그렇게 같고 나아가 하나인 줄로 알게 됩니다. 자기 앎에 하나님을 가두어 놓고서는 열심히 붙들고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되어버렸는데도 독실한 신앙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위치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도 추상적인 인간 개념이 아니라 타자와 그렇게도 구별되게 다른 줄로 착각하면서 거리를 두는 구체적인 자기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자기라는 인간’이 핵심적인 관건이 되는 것은 종교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일상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종교 안에서 가장 강하게 작동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진리의 이름으로 순교도 불사하는 신념의 숭고함을 마구 부정할 것은 아니지만 종교에서는 그러한 신념 안에 깔려 있을 수도 있는 ‘자기’를 살피지 않으면 여지없이 자기강박이 되고 타자를 향한 독단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강박과 독단이 얽혀 엄청난 폭력과 비극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게 자기도취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돌아볼 수 없을뿐더러 도리어 자기도취가 가져다주는 희열과 충만을 종교의 궁극적 경지로 새기면서 찬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찬양하는 것도 자기이지만 찬양을 받는 것도 자기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심층을 꿰뚫은 몇몇 종교들은 이구동성으로 ‘자기라는 인간’을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다루어왔습니다. 소승불교의 ‘무아(無我)’가 그러하고 대승불교의 ‘공(空)’이 그러합니다. 유교의 ‘수신’(修身)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교도 그 핵심적 가르침이 ‘자기 비움’(kenosis)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물론 이런 가르침이 대속사상에 휩쓸린 나머지 달갑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면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자기에 대하여 좀 더 머물러 살펴봐야 합니다. 다종교상황을 논한다면서 서론이 왜 이리 장황한가 하고 의아해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소상히 말씀드리겠지만 사실 종교간 관계방식인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경우 결국 ‘자기라는 인간’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고 의식하는가에 따라, 혹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생리적인 자기라는 것이 이미 거기에 그렇게 깔려 있어 그러한 입장들 중에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간단하게나마 살펴봅시다.
우선 ‘배타주의’부터 봅시다. 사실 이 표현은 자기에게는 쓰지 않는 말입니다. 타자를 배제한다는 것인데, 다름을 밀어낸다는 것인데, 뜻을 이렇게 풀게 되니 부정적 분위기 때문에라도 자기에게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 표현은 언제나 타자를 향해 쓰는 표현입니다. 배타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배타적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용적 자가당착입니다. 배타주의란 타자를 배제한다는 것인데 도대체 배제되어야 하는 타자는 누구인가요? 앞서 말한 대로 혼종성이나 구성적 상대성은 자기 안에 타자가 들어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타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배타주의가 말하는 배제하려는 타자가 자기를 구성하고 있으니 배타주의야말로 오히려 자기모순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를 대체하는 적극적인 표현으로 시중에서 많이 회자되는 ‘복음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이 표현의 취지에 동의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첫째로, 종교간 관계방식에서 특정한 입장을 ‘복음주의’라고 표현하면서 ‘복음’이라는 말을 독점한다면 다른 입장들은 복음과 무관하다는 것인가요? 자칫 다른 입장들에는 복음이 들어있지 않다고 마구 판단하는 또 다른 배타적 횡포가 됩니다. ‘복음주의’만이 ‘복음’을 전유한다는 것처럼 들리니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복음에 도대체 ‘주의’라는 것이 붙을 수 있는가요? 모든 형태의 ‘주의’는 전체를 부분으로 축소하는 환원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을진대, 온 세상을 향해 펼쳐져야 할 복음이 그 전체를 덮어버리는 지배의 힘으로 둔갑하는 듯이 비쳐지는 ‘복음주의’가 되어서야 될 말입니까? 세상에 누룩처럼 스며들어 그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복음이 색깔 칠하고 이름 붙이는 모양새로 나가서는 안 되겠지요. 셋째로, 게다가 ‘포괄주의’나 ‘다원주의’라는 표현에서 ‘포괄’이나 ‘다원’은 형식적 용어인데 비해 ‘복음주의’에서 ‘복음’은 내용적 용어이니 이 또한 등위적인 범주를 기준으로 한 열거원칙에 비추어서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포괄주의나 다원주의도 복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가 소위 복음주의와 다를 뿐이지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면 이는 단순히 용어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논리적으로는 배타주의와 포괄주의가 대조적이겠고 현실적으로는 배타주의와 다원주의가 대조적일 터이니 아무리 그 뉘앙스가 부정적이라고 하더라도 배타주의라는 용어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할 정도로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양상만 다를 뿐 다른 입장들에도 논의해야 할 꺼리들은 많이 있습니다. 포괄주의라는 표현에서도 자기는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배타주의의 자기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를 지닐 수 있습니다. 배타주의에서 자기는 타자를 배제하겠다는 것이지만 포괄주의에서는 타자를 자기 안에 포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서로 논리적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도대체 무엇인데 타자를 자기 안에 포함한다고 나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는 자기가 이미 타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혼종성과도 달리 이질적 타자를 지배하는 논리일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차라리 타자를 배제한다는 배타주의에서는 자기와 타자가 서로 무관하게 공존이라도 할 수 있는데 비해, 타자를 포괄한다는 이 태도는 만일 이를 서로 대상에게 시행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주도권 문제로 더욱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포괄주의야말로 포장만 바꾼 배타주의일 뿐 아니라 더욱 음습하고 교묘하다는 비판을 받기까지 합니다.
다원주의에서의 자기에 대해서도 역시 검토해야 할 꺼리들은 많습니다. 아니 다원주의는 말 그대로 다원적이어서 더욱 복잡한 갈래를 펼치니 문제가 더욱 복합적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유형만 살피더라도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목표는 같은데 가는 길이 서로 다른 여럿이라는 초보적이고 원색적인 다원주의 말입니다. 이런 초기 유형의 다원주의는 다름들의 단순한 공존을 말하는데 공존하는 다름들 각각은 서로 경계가 확실하여 구별될 수 있는 같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원주의도 비록 서로 다른 자기들 사이에서 다름을 밀어내거나 다름 위에 올라서지는 않더라도 서로 다른 자기들의 개별적 단위가 구별 가능한 실체라고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다원주의도 그 초보적 형태에서는 자기동일성 신화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깨닫고 구성적 상대성 또는 혼종성으로 인식을 전환하게 되면서 다원주의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배타주의-포괄주의-다원주의라는 관계방식들에 대해 서로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적절한가를 논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마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의 뿌리는 결국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그 타당성은 여전히 부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부분적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분인데 부분인 줄 알지 못하니 그냥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체라고 생각해야 적어도 자기동일성을 전제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같음이고 부분이 다름이니 전체는 좋아하지만 부분이라고 하면 싫어하고 저항합니다. 물론 착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은 모든 입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물론이고 다원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이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그래서 그런 착각이 일어나고 그런 착각을 계속 유지하게 됩니다. 아니 사실상 그런 착각 없이는 우리가 살아가기 쉽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우리에게는 그런 착각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다만 착각 안에 담겨 있는 타당성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직시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저 한 부분이라고 하면 다른 부분들과 다르니 틀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밀려들기는 하지만,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자기가 부분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지만, ‘자기라는 인간’이 모두 이미 이런 꼴이고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는 고정되었기보다는 움직이고 변화하는 부분입니다. 하여 내가 그런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걸 진솔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삶에서 부질없는 문제들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이고 따라서 믿음을 시작하는 길일 것입니다.
물론 내가 부분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한다고 해서 또 다시 전체를 싸안을 수 있는 입장을 도모할 수도 없습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이미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물론이거니와 다원주의, 특히 초기 유형의 다원주의도 이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입장들 모두 여전히 전체를 싸잡는다는 이론을 꿈꿉니다. 물론 허상입니다. 그러나 실마리가 있습니다. 자기라는 인간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는 것이 다른 부분들로부터 떨어져 칼같이 잘라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혼종성 또는 구성적 상대성이라는 것이 이를 가리킵니다. 좀 더 본격적으로 표현한다면,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은 세포가 분열하고 결합하듯이 다른 부분들과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계속하여 흐믈거리고 있습니다. 사실상 자기란 사실 무수한 타자들이 들락거리는 곳입니다. 들숨날숨이 그렇고 먹고 싸는 것이 그러하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러한 얽힘 속에서 뒹굴며 엮어져 가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이미 그러한 얽힘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같고 혼자만으로도 거기 그렇게 고색창연하게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도 사건이시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 ‘자기라는 인간’도 사건입니다.
하니 이제는 고정성의 분위기를 떨치지 못하는 ‘자기동일성’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가 겉보기처럼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또한 그 인간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이런 입장들이 대단히 달라 보이지만 자기라는 인간에 좀 더 정직하다면 그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영속하려는 욕망 때문에 자기는 언제나 동일한 실체일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 잡혀 이를 무의식적으로까지 전제하려 하니 상황이 애초부터 꼬이는 것입니다. 삶이 그렇고 믿음이 그렇고 종교가 그렇습니다. 동일하게 영속한다는 ‘자기’란 기실 신기루 같은 것인데 그저 없는 것을 붙잡고 꾸려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이제는 좀 더 정직하고 과감하게 자기의 실상을 바로 보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기’가 얽힌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풀어낼 실마리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