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는 역사전쟁이다. 교육부가 지난 10월12일(월) 전격적으로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제를 현행 검정에서 국정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전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전쟁을 주도한 장본인은 대통령과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이다. 이들을 뭉뚱그려서 집권세력이라고 하자. 집권세력이 국정화를 추진하는 의도는 명백하다. 먼저 국정화 시도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정치권은 내년 총선을 앞에 두고 있다. 지난 9월 한국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여론이 42%로 36%에 그친 여당 지지론에 비해 우위를 보였다. 사실 이런 여론은 사필귀정이다.
박근혜 정권은 출범부터 지금까지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원정 성추행을 신호탄으로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세월호 참사, 정윤회 문건 파동, 성완종 리스트, 메르스, 국정원 도·감청 의혹 등등 국가기강을 뒤흔드는 파문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거져 나왔다. 이런 와중에 정권은 철저한 사실규명 및 반성, 재발방지 약속 보다 대립을 부추겨 위기를 모면해왔다. 현 정권의 국정화 시도 역시 지지기반인 보수세력을 결집시켜 총선 정국을 이념대립으로 몰아가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국정화 시도의 두 번째 의도는 집권세력 수뇌부의 과거 세탁이다. 박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천황에게 개와 말처럼 충성하겠다는, 이른바 ‘견마지로’의 충성서약을 한 뒤 일군에 입대해 독립군을 토벌한 이력의 소유자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고 이후 18년의 집권기간 동안 철권통치로 일관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김 대표는 당 지도부에 오르는 순간부터 부친인 김용주(일본명 가네다 류조)의 친일 행적 논란이 고개를 들다가 급기야 <뉴스타파>의 심층 보도로 그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살아 있는 권력인 박 대통령과 차기 대권을 넘보는 김 대표 공히 부친의 친일행각을 미화할 나름의 필요성이 있는 바, 이번 정부와 여당의 한국사 교과서 강행처리는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임이 명백하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발표되기 무섭게 어버이연합 등 그간 정권의 보위부대를 자처해 오던 극우 단체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이에 앞서 정부-여당은 기존 검인정 교과서를 ‘좌편향’이라고 낙인찍으며 군불을 땠다. 이런 양상들은 과연 이 나라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역사는 해석의 문제다. 과거 일어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었다고 역사라고 하지 않는다. 특정한 관점에 따라 과거 사실을 면밀히 따져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선별하고 기술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다. 이런 맥락에서 E.H.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시각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게 마련이다. 더 확대해서 우리 민족이 걸어온 지난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고, 모름지기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면 이런 다양성을 용인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존 교과서가 잘못됐다고, 국가가 나서서 관점을 하나로 모은 다음 이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가르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민주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거 군주가 절대권력을 가진 조선시대에서도 임금은 사초(史草)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조선시대보다 진보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다른 한편으로 교과서 국정화는 대외관계, 특히 한일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그동안 박 대통령은 위안부 등 과거사를 빌미로 아베 일본 총리와 그 어떤 접촉도 하지 않았다. 그런 박 대통령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했다. 이런 행태는 1930~40년대 자신들이 벌인 침략전쟁을 미화하려고 ‘자학사관’ 운운하며 노골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극우세력과 다를 바 없다. 일본과 국제사회가 타자에게는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라고 강요하면서 아버지와 관련된 어두운 과거를 세탁하려는 박 대통령을 어떻게 바라볼까?
역사는 정파를 초월해 존재한다. 만약 정부-여당의 정치적 계산대로 교과서를 뜯어 고치겠다면, 앞으로 계속 이 나라의 역사는 정권의 향배에 따라 수정될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 이 나라는 곳곳이 상처투성이다.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졸업을 앞둔 젊은이들은 일할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땅에 발붙일 곳이 없어 목숨을 걸고 공장 굴뚝이나 전광판, 크레인에 오른다. 세월호 참사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가족들은 1년 넘게 거리에서 방황 중이고, 아들을 군대 보낸 부모들은 혹시 우리 아들이 군에서 횡행하는 가혹행위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지 않을까 노심초사다.
이런 와중에 난데없는 역사전쟁이라니, 정부-여당 모두 무슨 생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지 모르겠다. ‘위기’를 뜻하는 영어 낱말 ‘crisis’는 그리스어 ‘크리시스’(κρίσις)에서 유래했다. 이 낱말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 손대려는 세력은 심판을 피해가지 못했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이제 심판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