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자유와 해방 ①

김근수(<가톨릭프레스> 편집인, 해방신학연구소장)

[편집자 주] 지난 10월17일(토) 오전 서울 종로구 사간동 화쟁아카데미에서 열린 2015 종교포럼  “종교를 걱정하는 불교도와 그리스도인의 대화: 경계너머, 지금여기”에서 김근수 <가톨릭프레스> 편집인이 발제한 내용의 전문이다. 그동안 ‘가난’에 천착해 왔던 김 편집인은 이번 발제를 통해 ‘자유와 해방’을 화두로 꺼내 들었다. 김 편집인의 동의를 얻어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가톨릭프레스> 김근수 편집장. ⓒ베리타스 DB

첫 발제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나는 ‘가톨릭의 권위주의’를 들었다. 가톨릭은 하느님이 주신 구원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덜 관용적이기 쉽다. 권위주의는 외적으로 ‘가톨릭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는 태도로, 내적으로 ‘가톨릭교회의 핵심은 성직자’라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가톨릭의 문제는 교회권위주의와 성직자권위주의 두 가지에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가톨릭은 교회권위주의, 성직자가 최고라는 성직자권위주의를 얼른 버려야 한다. 이웃 종교, 평신도를 존중할 뿐 아니라 가장 먼저 가난한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자신을 최고로 내세우는 가짜 권위주의를 버리고 고통받는 사람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 진짜 권위주의다. 가난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진짜 권위다.   
왜 걱정인지를 다루는 두 번째 발제에서 나는 ‘그리스도교와 가난’이라는 주제를 말했다. 권위주의 있는 곳에 돈과 권력이 모인다. 돈과 권력이 없는 권위주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가 가난해지면 종교의 권위주의도 누그러진다. 권위주의를 고치는 약은 바로 가난이다. 
‘그리스도교와 가난’이란 주제에서 가난한 사람과 그리스도교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가난 문제를 다루었다. 누가 가난한 사람인지, 가난은 권력 차원에서도 다루어야 하며, 가난과 가난한 사람을 분리할 수 없고, 가난은 가치중립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지금 종교의 숨은 신은 돈 아닌가. 종교에 돈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라 돈이 많아서 걱정이다. 돈이 없어서 망한 종교는 인류 역사에 없었다. 가톨릭이 가난해서 문제가 아니라 부자여서 문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오늘 질문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나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이상을 그리스도교가 강조해야 한다고 요약하고 싶다. 하느님은 해방자이고 예수도 해방자로 살았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교황, 『복음의 기쁨』 187)   
순종, 복종, 믿음 같은 단어는 그리스도교에서 수없이 들린다. 그런데, 평등,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자유와 해방이라는 단어가 교회에서 설교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가. 자유와 해방은 사실상 금기시되는 단어로 여겨지지 않는가.    
종교는 자유와 해방을 가르치기는 하는가. 자유와 해방을 언급한다 해도 자유와 해방을 위해 애쓰긴 하는가. 아니, 종교는 자유와 해방을 싫어하고 방해하지 않는가. 종교인들은 가난과 민주주의를 사실 가장 싫어하지 않는가.    
종교를 가지면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는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지금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사는 얼굴로 보이는가. 자유와 해방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직 아닌데 말이다. 자유와 해방의 주제 앞에서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다음 두 질문 앞에 평생 서야 한다. 예수는 왜 “기쁜 소식”인가? 그리고 예수는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을까?  
예수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면 우선 예수에게 영향을 받아야 한다. 제3자적 냉철한 객관성으로 예수를 제대로 알거나 말하기는 무리다. 바다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바다를 논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배에서 바다를 연구하는 사람은 바다에 영향을 받는다. 종교학자는 아무리 애써도 신학자가 되기는 어렵다.   
A. 자유와 해방
독일신학에서 한때 이런 질문이 있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을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가  유다인 박해에 찬성한 죄를 저지른 이후에도 신학하기가 도대체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떤 신학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물어야 하나. 세월호 이후 신학할 수 있는가. 민족사에서 참혹한 사건을 겪은 후에도 신학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가. 제주 4.3, 보도연맹 학살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신학의 운명에 충격을 준 사건은 너무도 많다. 
다른 주제가 또 있다.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신학 할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가능하며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죄와 죽음을 깊이 묵상한다면 구조악은 부차적인 주제로 밀려나게 되는가. 종교에서 죄와 죽음은 1급 주제이고 구조악은 2급 주제일까. 구조악이 사라진 이상 사회가 도래한다 해도 죄와 죽음은 인간이 당연히 고뇌할 중심 주제겠다. 그런데 구조악이 사라진 사회가 언젠가 오기는 할까.    
신앙과 이성의 관계가 서양 그리스도교 역사를 관통하는 사실상 유일한 주제였다. 철학, 문학, 심리학 등 여러 학문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인간 이성이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해하느냐의 주제였던 것이다. 인간 이성의 능력과 한계와 위험을 또한 다루게 되었다. 주로 선진국 지식인들이 즐겨하는 주제였다. 
그러나 신앙과 정의의 관계라는 중요한 주제가 그리스도교에 분명히 있다. 하지만 신앙과 정의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마치 2등급 주제처럼 여겨져 신학과 교회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예수의 핵심 메시지인 하느님 나라는 신앙과 이성보다 신앙과 정의를 주로 다루었는데 말이다. 예수는 지식인에게 우선 진리의 모습으로 탐구 대상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게 우선 따라야 할 기쁜 소식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사람들은 예수에 집중하고 말았다. 예수를 보면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한 예수를 동시에 보아야 하는데 하느님 나라는 망각하고 예수만 본 것이다. 적어도 19세기까지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 나라는 거의 잊혀진 주제였다. 그러니 신앙과 정의의 관계라는 주제는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것이다.   
신앙과 정의의 관계에서 자유와 해방은 핵심 주제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해방자 하느님으로 먼저 자신을 알려주셨다. 그 다음에 비로소 창조주 하느님을 유다인은 알아보게 되었다. 창조주 하느님에서 해방자 하느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해방자 하느님에서 창조주 하느님을 보았다. 그 순서가 아주 중요하다. 해방 체험이 없는 사람은 창조의 기쁨을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해방 체험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기 어렵다. 
자유와 해방을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세 가지로 분류하여 해설하였다. 죄, 죽음, 구조악으로부터의 해방 말이다. 죄는 용서로써, 죽음은 부활로써, 구조악은 하느님 나라로써 대응하여 설명하였다. 죄와 죽음은 주로 개인 차원의 주제로 다루어 왔고 그동안 그리스도교에서 실컷 언급되었다. 나는 구조악을 중심으로 자유와 해방을 다루고 싶다.    
자유와 해방이라는 단어만 논하려 해도 시간과 지면이 모자랄 것이다. 그 개념을 정의하고 토론하려 해도 논란과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해방이 무엇인가에서 하염없이 지체하지는 말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안하는 자리가 적절하지 않을까. 오늘 토론을 위해 문헌, 인물, 사례 등을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자유와 해방의 개념 정의, 자유와 해방을 이루는 방법 등 학문적으로 여러 정당한 토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유와 해방은 학술 토론에서 마무리될 주제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에서 결판날 주제 아닐까.   
자유는 긍정적인 가치를, 즉, “무엇을 향한” 개인 중심의 선진국형 개념이라고 말해보자. 그에 비해 해방은 부정적인 “무엇에서 벗어나는” 집단 중심의 제3세계형 개념이겠다. 예를 들어, 선진국 여성신학은 중산층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면 제3세계 여성신학은 가난한 여성들을 주요 대상으로 본다.  
한국 가톨릭 학자들이 대부분 이태리, 독일 등 유럽에서 공부하였다. 그들은 신앙과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가 주축인 해방신학의 문헌을 접한 경험이 없다. 한국 개신교 신학자들 대부분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 주로 공부한 경험이 있다.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자들은 여전히 선진국형 신학 주제를 주로 다루는 것 같다. 그들이 신앙과 정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아직 여건이 부족한 것 같다.  
B. 고통의 문제
자유와 해방이란 주제는 고통이란 주제를 전제한다. 고통의 문제는 불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에도 역시 중요한 주제다. 고통의 문제를 다룰 때 고통의 시간적 공간적 바탕인 역사를 외면하는 것이 가능한가. 역사를 따로 떼어놓고 고통이란 주제를 다룰 수 있을까. 역사도 모르면서 고통을 탐구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을 바꾸면 세상의 악이 사라지는가. 내가 죽으면 세상의 악과 타인의 고통은 무의미하고 마치 없는 것과 같은가. 
그리스도교는 고통이 무엇인가보다 누가 고통 받는 사람인가를 먼저 묻는다. 고통이라는 개념을 분석하기 전에 실제 고통받는 사람의 현실을 먼저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본질보다 존재를, 존재보다 현실을 먼저 본다. 종교는 개념이 아니라 현실을 우선 말한다.   
누가 고통 받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자기를 먼저 보고 나서 남에게 나아가는 방식도 있지만 남을 보며 동시에 자신을 보아가는 방식도 있다. 그리스도교는 후자를 택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교는 고통의 기원과 종류에 대해 불교보다 자세히 다루진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고통과 악이 왜 생겼느냐 고뇌하는 모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 받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공감하고 고통을 줄이는데 함께 하도록 요청할 뿐이다. 그리스도교는 고통 탐구보다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함을 좀 더 신경 쓴 것 같다. 
그리스도교에 악의 신비라는 단어가 있다. 악이 신비롭다는 뜻이 아니라 악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악은 단순하지 않고, 악마는 복잡함 속에 숨어 있다. 예수는 악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악을 줄이기 위한 싸움에 자기 목숨을 바쳤을 뿐이다.    
죄와 죽음을 깊이 묵상한다면 구조악은 부차적인 주제로 밀려나게 되는가. 종교에서 죄와 죽음은 1급 주제이고 구조악은 2급 주제일까. 구조악이 사라진 이상사회가 도래한다 해도 죄와 죽음은 인간이 당연히 고뇌할 중심 주제겠다. 그런데 구조악이 사라진 사회가 언젠가 오기는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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