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4일 수요일 오후7시/삭개오작은교회/김경재 목사
갈릴리복음 성서학당 제1강좌
전체주제 : 하나님과 창조세계
오늘주제 : 하나님은 공개된 비밀; 하나님 부재체험과 순수의식의 물음
[1] '하나님은 공개된 비밀'(함석헌)이라는 말이 은유적으로 전하려는 뜻은?
- 공개된 비밀이란 역설적 표현이다. 역설(逆設, paradox=para+doxa, against the public opinion)은 일반 상식적 견해에 배치되거나 어긋나는 상태를 말할 때 쓴다. 공개성(계시성)과 비밀성(은폐성)은 상호대립되는 관계인데, 그것이 동시에 진시이 되는 진리를 표현하려고 할 때 우리는 '역설적 진리'라고 말한다.
-알고보면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신앙체험의 진술들은, 삼단론법적 진리도 아니고 변증법적 진리도 아니고 거의 모두가 역설적 진리들이다. : 예를들면,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자는 얻으리라(마10:39)"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까 더욱 넘쳤다(롬5:20)"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개' 되어있다는 말은 하나님은 항상적(恒常的)인 공개성, 보편성, 접근가능성, 독점불가성, 개방성, 근거리성을 말하려고 한다(행17:27-28). 하나님 인식적 체험 가능은 인간의 습득한 지식여부, 사회적 신분차별, 빈부차이, 문화차이, 종교유무와 상관없이,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자연스럽고 쉽게 찾아 입술로서 빨듯이 일상적 삶 체험 속에 가까이 있고 쉬운 것이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 동시에 하나님은 비밀이라는 말은 논증하기 어렵고, 전유(專有)불가능하고, 충분하게 설명하거나 진술하기 어려운 '신비자(the Mystery)'라는 것을 뜻한다. 이사실을 가장 정직하게 피력한 철인은 계몽주의 시대의 아들 임마누엘 칸트였다.
-지구중력현상, 지구공전현상, 물리학에서 빛의 이중성 현상, 생체순환계의 운동현상 등은 우리 생활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개된 비밀들'의 사례이다. 우리들의 생명을 그원적으로 떠받히고 있으면서 삶을 가능케 하는 힘이나 원리들은 '공개된 비밀'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폴틸리히는 "하나님은 존재의 지반이요 존재의 능력이다"(God is the ground of being and the power of being)라고 말했다.
[2] 20세기 '신부재 체험'과 '의심의 대가들'의 용기있는 비판적 무신론 주장의 의미평가
2-1. 20세기는 인류 종교문화사에서 神不在 체험(신 죽음 체험)의 절정기
- 1차, 2차 대전의 처참한 전쟁터의 생명살상과 불의와 거짓의 발호, 죄없는 사람들의 무의미한 죽음은 특히 유럽문명권의 종교들이 전제한 '초월적 유신론 신앙'을 근저에서 흔들어버리게 되었다. 그 대표적 상징사건으로서 유대인 대학살(아이슈비치에서의 홀로코스트) 체험이 있다. 그런 일들은 '신부재 체험'과 동시에 전통적 신관에 대한 근본적 회의 및 재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 19-20세기 제반 학문계의 발달은, 하나님 신앙을 전제하는 종교적 인문학을 삶의 변두리문제, 개인적 사사로운 관심거리로 몰아내고, 공공성의 영역에서 종교나 윤리 차원에서 '삶의 의미와 궁극적 가치'보다 '실용성과 현실적 능률성'을 추구하였다. 초월과 종교관심은 현세와 자기충족적 자율문화로 대치되고 충분히 성인이 되었다고 자임하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 사회'가 되었다. 문제는 成人들의 성숙사회가 못됨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가면서, 천문학과 우중항공 기술의 발달, 분자생물학의 유전공학기술의 발달, 의학과 심리학분야의 학문발달은 특히 전통적 셈족계 종교가 말하는 '초월적 신관'의 패러다임전환을 촉구하게 되었다.
2-2. 현대사상사에서 '의심의 대가들'이 던지는 종교비판에서 경청해야할 점들과 그 한계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신은 죽었다" / 신체, 감각, 욕망, 현실적인 것을 억압하고 노예의지를 강화시키는 서양종교로의 기독교를 비판했다 .의지의 철학, 초인의 철학, 영원회귀의 철학을 강조했다. 신체성과 의지적 존재로서 현실적 생명을 중시하는 니체철학은 변질된 서양기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였다. 그는 기독교의 관념적 신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참 신의 만남을 거부하고 '초인철학'을 강조함으로서 본이 아니게 나치즘이나 파시즘의 이념적 근거를 제공하고 말았다. 우상을 파괴한 후에 또 다른 우상을 세우고 말았다.
-지그문트 프로이드(1856-1939) : "종교란 개인의 신경강박증처럼 인류의 집단무의식의 신경강박증 같은 무의식적 외디푸스 컴플렉스이며, 그 본질은 환상에 기초한 것이다". 프로이드는 서구 2000년 기독교 특히 제도적 교회의 가부장적 권위체계와 타율적 금욕주의가 인간을 미성숙상태로 잡아놓고, 본능을 억압하며, 인간의 해방을 가로막는 가부장적인 권위의 허위의식으로 본 것이다. 프로이드는 계몽주의 정신 곧 모든 허위의식의 비판을 통하여 인간해방을 강조한 사상가였지만, 갈릴리 복음이 지닌 참된 자유와 해방의 힘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 석가, 간디, 슈바이처, 톨스토이, 아인슈타인 등이 만약 프로이드 이론처럼 미성숙한 신경강박증 환자들이라 한다면, 인류중에서 신경강박증 환자 아닌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는 이성의 과학빛으로 해방시키려 하지만 그의 정신분석학은 도리어 인간본질이 비합리적 '욕망충족의 본능에서 쾌감원리로 살려는 비합리적 존재'로 본다는 점은 자기 당착적 모습을 드러낸 사상가이다.
-칼 마르크스(1818-1883) : "종교란 억압받는 인민의 신음이며, 민중의 아편이며, 지배계층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니체의 종교비판이 철학적 비판이며, 프로이드의 비판이 과학적 심리적 비판이라면, 마르크스 종교비판과 신부정의 무신론은 사회과학적 비판이라는 점에서 공헌한다. 타락한 종교, 변질된 종교가 권력에 기생하고, 지배권력과 야합하여 부귀를 추구하고, 민중의 고난과 비극을 극복하는 일을 방치한다면 언제든지 마르크스 종교비판은 타당하고 정당하다. 그의 종교비판의 한계는 너무나 사회과학적 현상학에 갇혀있기 때문에 , 종교의 근원과 본질비판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는 '인민의 억압기제'로서가 아니라 해방기제로서 작용하는 창조적 힘을 간과한다. 그가 꿈꾸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안에서 또다른 권력의 종교화, 우상화를 막지 못했다.
[3] 인간 마음의 순수의식, 절대정신과 하나님 물음의 문제
- 위에서 현대사상가 중 가장 본질적으로 종교비판과 신비판을 가한 '의심의 대가들'의 사상은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참 종교와 올곧은 신앙심의 본질에서 떠난 권력화한 종교들, 병든 종교와 종교인들을 각성시키는데 훌륭한 공헌을 한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종교비판과 하나님의 부정철학은,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병든 인간과 병든사회를 비판하는 것이지 그들의 비판이론 결과 인류사회속에 종교가 없어지거나 하나님을 향한 진솔한 신앙인의 깊은 영성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더욱더 깊어지고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위 의심의 대가들이 비판한 종교들의 유형은 주로 셈족계 종교들이 지닌 '인격적 초월신관'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적세계 어딘가에 절대군주와 같은 초인격적 존재가 좌정하여 인간사를 주관한다는 '임시해결사로서의 신'(deus ex machina) 관념이, 현대인의 성숙한 삶의 체험 특히 고난체험을 통해서 더이상 설득력과 타당성이 없어지므로 극복되어야 할 구시대의 신관임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은 대상을 인식하는 분별판단능력으로서의 정신기능만이 아니다. 사람이 대상을 안다는 현상과 그 앎의 사실을 다시한번 되생각함으로서 인식작용자체를 뛰어넘는 '자기초월의 정신'이다. '주객구조'(主客構造)안에서의 대상에 대한 분별지(分別智)를 넘어선 순수의식의 깨달음을 종교철학 전통에서 여러가지로 이름하여 불렀다. 프라쥬나(반야지혜), 불성, 법성, 眞然自成, 本然之性, 얼나, 순수의식, 절대정신, 신적 로고스 등이다. 동양한자문화권에서 말하는 신(新)이라는 관념이나 사상보다도 훨씬 심원한 것이다.
-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위에서 예로든 다양한 어휘가 지시하는 '순수의식' 그 자체는 불생불멸하고 개념규정이 불가능하며 무소부재하여 시공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자 인간으로 하여금 시시 때때로 모든 실재들을 "환히 꿰뚫어 비취는 앎"에이르게 한다. 그 순수의식은 개인적 무싀식도 집단의식도 아니다. 그 순수의식이라는 모든 정신적 지반과 능력 안에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논쟁도 가능하다. 그 실재는 우리 마음안에 와있는 내재적 초월자 임에 틀림없지만, (고 김수환 추기경과 어린아기의 존대대화 참조), 동시에 그 전체성을 포촉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무제약적 포괄자(야스퍼스)'이기때문에 때론 무(無), 공(空), 이름할 수 없는 도(道)라 불렀다.
-그리스도교 신체험은 이러한 무제약적 초월자로서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주하나님,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안에 계신 하눈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한분이라는 표현은 숫자적 양적개념이 아니고 질적개념이다. 그 보다 더 이상 큰 무엇을 생각할 수 없는(안젤무스), 한없이 높은 곳에서 계시면서도 내가 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 분(어거스틴), 빛만이 아니라 어둠도 창조하시어 빛과 어둠의 주主가 되신 분(이사야45:7)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순수의식에 내주하시고 함께하지만 사람의 순수자의식 그자체가 곧 하나님이라고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신비주의 두 전통이 있는 이유이다. 사람의 궁극적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찾고, 그 생명에 참여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일이다.(마1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