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한국 기독교는 오늘날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지난 2015년 11월 10일 방배동 백석대학교에서는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추계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발표된 이관표 박사(연세대 강사)의 논문 “한국 기독교의 정치참여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은 앞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민하던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꽤 강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관표 박사(연세대 강사). ⓒ베리타스 DB |
논문 안에서 저자는 정치가 특수한 분과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삶의 기술임을 밝히면서, 기독교인들이 그 어느 때보다 세속권력의 잘못에 침묵하지 않고 저항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관표 박사는 이 저항이 단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만 수행되어야 함을 제안하고, 이와 동시에 이 저항으로부터 혹시라도 세속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경우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의 획득을 포기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자세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비움(케노시스) 안에서 보여주었던 삶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기준으로 보수우파 기독교 세력과 진보좌파 기독교 세력, 특별히 민중신학의 한계를 비판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안한다. 참다운 기독교인의 삶은 어떠한 핍박이 와도 결코 기득권 혹은 권력의 정의롭지 못한 횡포에는 침묵하지 않으면서도, 혹시라도 비판을 통해 세속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 그것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치적 태도를 받아들일 때,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새로운 극복될 수 있다는 저자의 결론은 새로운 기독교의 정치패러다임을 제안하였다는 평가를 여러 곳으로부터 받고 있다. 이관표 박사는 연세대에서 신학박사(조직신학)를, 독일 드레스덴대학에서 철학박사(실천철학/윤리학/종교철학)를 받고 현재 연세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아래는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이관표 박사의 글 전문이다. 내용의 분량상 1,2편으로 나눠 싣는다.
한국 기독교의 정치참여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발터 벤야민과 하워드 요더에 관련하여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한국 기독교의 정치참여 비판
1) 한국 기독교 우파의 정치참여와 그 한계: 보수교회의 경우
2) 한국 기독교 좌파의 정치참여와 그 한계: 민중신학의 경우
3. 모든 폭력의 멸절로서의 신적 폭력: 발터 벤야민
4. 포기로서의 권력: 존 하워드 요더
5. 예수의 자기 비움의 힘: 현실의 고난에 참여하되, 기득권으로부터는 떠나라!
6.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이제 현대인들은 종교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는가? 불과 100년 전만해도 누군가 인간이 종교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멀게는 유럽에서 기독교는 목숨을 지켜주는 삶의 울타리였고, 가깝게 한국에서는 유교가 올바르게 사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어떨까? 확실히 현대에 종교는 그 어떤 때보다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그 신뢰마저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이미 현대의 한국 교회 역시 그 신뢰감에서 바닥을 친지 오래이다. 그곳은 이미 경영과 관리, 시장질서의 끊임없는 이윤확대와 성장 신화로 범벅된 회사가 되었으며, 나아가 교회건물과 신도를 사고파는 비윤리적인 목회자들의 부동산쯤이 되어버렸다고 비판받는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막 11:17)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 한국교회의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본 글은 앞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특별히 한국 기독교의 정치권력화 역사 안에서 비판해보고, 그 극복의 대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의 힘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물론 여기서 언급하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의 힘이라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고 방대한 해석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분명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이것은 십자가, 즉 보수주의신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유주의신학에 이르기까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을 숙고하게 될 때 의외로 간단하게 나타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그분이 행했고, 그래서 신약성서에서 보고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 그 자체, 즉 ‘잘못된 세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세대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내어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논의 전개와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2장에서 한국 기독교회의 정치권력에 대한 태도를 두 가지 정치참여의 흐름을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정치참여의 두 가지 흐름이란, 투박하게 구분하여, 정치 기득권층을 지지하고 협조했던 우파 보수교회와 정치 기득권층을 비판하고 저항세력에 협조했던 좌파 민중신학을 지칭한다. 그 이후 우리는 3장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신적 폭력’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고, 4장에서 여기에 연결하여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의 예수의 정치학의 주요 주제들을 다루게 된다. 그리고 앞서의 논의들을 종합하여 5장에서는 ‘세속 권력에 대한 비판과 권력획득의 포기’라는 예수의 자기 비움의 힘을 제시하도록 한다.
결론을 앞서 이야기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자기 비움의 모습은 기득권 세력의 잘못을 비판하되 결코 세속적 정치권력을 획득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떠한 핍박이 와도 결코 기득권 혹은 권력의 정의롭지 못한 횡포에는 침묵하지 않으면서도, 혹시라도 비판을 통해 세속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 그것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한국 기독교가 현대에 직면하고 있는 사회-정치적 비판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핵심적 태도이다.
2. 한국 기독교의 정치참여 비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삶의 기술이라 정의한다. 이 말은 한편으로 정치가 삶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최대한 임의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임도 암시한다. 즉, 삶의 기술로서의 정치란 삶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또한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노력여하에 따라 변경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치는 기독교 안에서도 필수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갈대와 우르를 떠나 여러 나라와 민족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던 것도 각 나라 왕들과의 정치적 협상덕분이었고, 이스라엘의 찬란한 기억인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도 외교적 정치로 가능했었으며, 나아가 신약의 바울 역시 전도여행 중 당하는 어려움들을 로마시민권자로서의 정치로 극복하고 있다. 물론 예수의 삶 역시 결코 정치와 떨어질 수 없다. 이처럼 정치가 기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면, 과연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것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는가? 이번 장은 한국에서 벌어졌던 교회의 정치권력관계를 두 가지 흐름에서 살펴본다.
1) 한국 기독교 우파의 정치참여와 그 한계: 보수교회의 경우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한국 기독교 우파’에 대한 정의가 분명히 제시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여기서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를 정치적으로 표방하는 교회 내의 세력으로 한정된다. 다시 말해, 한국 기독교 우파란 해방이후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함으로써 남한에서 기득권에 속했고, 또한 현재까지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기독교 세력을 뜻한다. 이제 우리는 개략적인 역사개관을 통해 기독교 우파가 한국 내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했으며,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해 왔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한국 기독교 우파는 역사 초기부터 독특한 성격을 드러내왔다. 이 성격이란 친정부적인 정치참여를 의미하며, 이러한 사실은 6.25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보다 넓게 규정해서, 여기에는 기독교 근본주의, 성령과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 성향의 교회, 그리고 영미권의 복음주의 성향의 교회까지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 내에서 흔히 통용되듯이) 기독교 우파는 정치권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종교적인 미덕으로 주장하지만, 그들의 특유의 보수적인 성격은 여전히 현대 정치에 분명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때때로 정치적 정당의 구성을 시도해왔기 때문이다.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이들이 보여주는 ‘정치적인 침묵’의 액션은 사회적으로는 ‘암묵적 동의’라는 말로 읽어도 무방하다. 특별히 최근에도 이러한 흐름은 계속되고 있는데, 올해 3월 6일 조찬 기도회에서 김삼환 목사의 설교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적 성향을, 그리고 세월호 사건에 관한 이찬수 목사의 설교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성향을 각각 잘 대변해주고 있다.
보수교회의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는 미국이라는 선교국의 영향으로 본다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성격은 결국 1920년대 한국 기독교가 농촌 운동, 계몽 운동 등 사회운동을 전개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과의 충돌이유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광복을 맞이한 1945년 즈음 개신교도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미군정은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생긴 통치 행정상의 공백 대부분을 친미적 인사로 메우는 작업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결국 개신교 장로였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외에도 주요 국가기관 및 고위직들이 개신교 인사들로 채워졌다. 그저 사회주의와 대립하는 한 축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만을 행사하던 보수교회가 실제 정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당시를 회상하는 사람들과 당시의 기록들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아가 권력승계의 도구로서 기독교를 사용하려 했다는 점에 대체적으로 수긍한다.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형무소의 형목제와 군목제를 실시하고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한 언론매체의 발달을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여러 계기를 통해 결국 보수교회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획득하게 된다. 이승만 정권의 특혜를 입은 보수교회는 그 이후 1952년 정부통령 선거를 시작으로 정치개입을 시작하였고, 이승만, 함태영 등 기독교인 후보를 위해 권연호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기독교 선거대책 위원회’를 열고 선거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4.19 민주항쟁과 5.16 쿠데타 이후의 정치적 상황에서 한국 개신교 우파와 한국 정권과의 밀월관계가 가장 잘 나타났던 사건은 베트남전쟁이었다. 6.25 전쟁에서 북한세력에 의해 탄압 및 살육을 경험했던 기독교 세력은 태생적으로 미국 및 남한의 정치세력과 밀월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한국 교회는 권력에 힘을 실어주고 공산주의를 악으로 규정하는 반공사상에 세례를 베풀게 된다. 즉, 공산주의는 사탄의 세력이며, 베트공 역시 사탄의 아들이다. 이러한 의식 때문에 1966년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아이러니하게도 “파월백마부대 환송연합예배”를 주최하고 주관하게 된다. 이외에도 1970년대 이후에는 한일 외교 정상화 문제와 민주화 운동을 평가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찾는다는 명분하에 정치적으로 침묵하는 변형된 형태의 보수교회들도 등장한다. 물론 정치적 침묵을 주장하던 이 교회들 역시,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존의 주장이 무색하게, 당시 정권의 정책을 종교적으로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이율배반의 모습을 보이고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독교 우파, 즉 보수교회의 정치적 행위들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우리는 먼저 한국 기독교 우파가 이처럼 국가의 권력에 복종하면서도, 동시에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를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보수적 한국 교회의 복종 및 정치적 참여는 언제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행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엇인가 기득권으로부터 받아 내거나, 혹은 기득권이 되기 위해서 행해지는 순종 혹은 정치적 참여는 결코 기독교적인 것이라 말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정부가 요청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정부로부터 일종의 대가를 취하는 방식은 교회가 보여줄 정치적 태도는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건국 초기부터 있어왔던 보수교회의 정치 참여는 마치 세상을 모두 경영해야 한다는 일종의 자만의 형태로까지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보수교회는 기독교의 가치관을 앞세워 대안 정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모습으로 정치에 참여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보수교회가 예수로 대변되는 사상적 뿌리보다, 앞서 언급했던 반공주의와 친미주의와 같은 일종의 세속적 가치관을 더 중요하게 표방했음을 입증한다. 때때로 나타났던 1970년대 이후의 정치무관심 형태 역시 대외적으로는 무관심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 세력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해주고, 그럼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참여의 기회를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비판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제 우리는 앞서 살펴본 한국 기독교 우파와는 다른 방식의 정치참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미 정치가 삶의 기술인 이상 모든 기독교인이 정치와 상관없이 살 수 없음은 자명하다. 단지 우리가 예수를 따라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으로서 과연 이 정치와 밀접히 관계되어 있는 삶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끌어갈지가 문제일 뿐이다. 보수교회 정치세력들은 북한과의 대립 및 미국과의 관계 등을 이유로 기득권 세력으로의 진출욕망을 추구해왔다. 물론 기득권과 다른 측면의 정치참여 흐름이 한국의 현대사 안에 있었으며, 우리는 이제 그것을 민중신학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본다.
2) 한국 기독교 좌파의 정치참여와 그 한계: 민중신학
민중신학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 전 우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분명히 하기로 한다. 첫째, 본 글에서 민중신학은 편의상 기독교의 정치 참여방식 중 좌파성격으로 분류된다. 여기서 언급된 좌파성격이란 결코 민중신학 자체가 사회주의 운동의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중신학은 현실 한국정치에서 저급하게 언급되는 단어들, 즉 ‘종북,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에 저항한다는 뜻을 지닌다. 게다가 민중신학은 결코 순수 좌파로 규정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목적은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이 아니라, 민중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수사건의 재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의 논의는 결코 민중신학의 이론적 측면에 집중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중신학이 상황신학인 한에서 그것의 이론화란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나타난 반성작업일 뿐이며, 그런 한에서 민중신학 자체의 본질적 모습, 즉 현장의 소리를 대변하는 모습을 방해할 우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민중신학이 가진 신학체계는 상황신학의 한계 때문에 몇 가지 잘못된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기본적인 민중신학의 개념들만 살펴보고, 곧바로 민중신학이 관여했던 구체적 사건들 및 한계점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우선 민중신학이란 “상황적이고 자생적인(contextual and indigenous) 한국인들의 신학”으로 트레이시의 조직신학의 구분으로 규정해 본다면, Praxis-Theology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민중신학 안에는 분명한 이론체계 보다는 그 현장 중심적 성격 때문에 유동적인 이론 및 정의들이 속해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미 민중이라는 개념자체의 정의부터 불분명하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정의가 불가능한 것이다. [...] 민중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금 거칠게 규정하자면, 민중이란 한국적 상황에 살고 있는 백성이면서도 소수의 지배층에 의해 억압받는 대중이고, 나아가 한국 역사의 주체라 말할 수 있다. “민중은 경제적으로는 가난하고, 정치적으로는 약하며, 사회적으로는 박탈당한 자들이지만,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는 부유하고 힘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 “민중이 나를 구원하는 메시야적인 위치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수의 생애 자체가 민중해방이고 예수를 통해서 민중해방 사건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메시야란 결코 존재론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 당시에 벌어졌던 사건이면서, 또한 지금도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이 말하는 메시야란 당시 시대 상황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예수가 민중이고 민중이 예수’라는 이 슬로건은, 우리가 상황과 시대의 아들로서 고난 받는 민중의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재현으로 인식하고, 또한 그 안에 참여해야 한다는 시대상징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의 주요관심사는 교리적 엄밀성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 교회가 하지 못했던 ‘신학적 인식과 윤리적 실천의 일치’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 교회의 기득권에 대한 욕심과 다르게 참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그에 필요한 희생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민중신학은, 그 신학내용의 독특성과 상관없이, 분명한 신학적 태도를 정치적 비판과 저항으로 드러내었으며, 우리가 본 논문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특별히 “이 신학의 발전은 1960년대 초반의 도시산업선교 활동에서 찾아야 한다. [...] 거대한 불의와 부당한 노동 조건에 직면한 이 기독교 노동자들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을 자신들의 사도적 활동의 일환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정치-사회참여의 운동이 표면적으로 분출됐던 사건은 바로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전태일의 사건에서 비로소 민중신학은 현실에서 고난당하고 죽어가는 민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이 시대에 재현되어야 함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저항적 정치참여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반유신체제 시위로부터 광주항쟁을 거쳐 6.10 항쟁에 이르는 저항시위 안에는 언제나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문동환, 서광선, 김용복, 그리고 문익환 등의 1세대 민중신학자들”이 있었다. 또한 이들을 포함한 소위 말하는 민중지식인들은 저항운동을 통해 대학교수직에서 추방되고,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직접적인 저항시위 참여 이외에도 민중신학자들은 특별히 산업선교운동을 조직함으로써 정치적 저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들의 주도로 “도시산업선교는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이후, [...] 노동자들을 소그룹으로 조직하여 성경공부, 노동법 특히 근로기준법 강의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을 높였다.” 또한 이러한 각성을 통해 민주적 노동조합, 8시간 노동쟁취,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의식화, 해고자의 복직 등을 위한 다양한 노동운동과 시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산업선교의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에게 비판적이고 민주적인 의식을 불어넣어 주어 건강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산업선교운동과 더불어 민중신학을 핵심으로 하는 교회의 조직과 종교활동 역시 계속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100여개의 민중교회가 세워졌다. 민중교회들은 [...] 민중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여 주고 그들의 투쟁에 동참하였다.”
물론 민중신학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민정부의 출현과 민주화의 발전을 통해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쇠퇴의 이유는 아마도 민중신학이 상황신학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억압구조가 많이 사라진 지금, 민중운동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어지고 있는 시민운동으로 변모되었고, 따라서 교회를 통해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강한 정치적 투쟁보다는 종교적 예식과 마음의 안정이라는 내적인 측면으로 많이 기울게 된다. 따라서 민중신학자들은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기 위해 저항운동 혹은 민중운동을 떠나 기득권으로서의 정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민중신학의 현실적 한계로서 비판하려는 점이다. 왜냐하면 민중신학자들은 결국 국가권력에 투신하여 그것을 행사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의 신학적 타당성 여부를 제쳐두고, 민중신학은 기득권에 대한 비판을 견지했음에도 결국 또 다른 기득권 세력이 되고 마는 우를 범했다. 우리는 이러한 민중신학자들의 욕심과 다른 독일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일 나치시절 당시의 국교회(Landeskirche)들이 히틀러를 찬양했던 반면, 칼 바르트로 대변되는 고백교회는 바르멘 신학선언을 통해 기득권 세력에 저항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은 국가에 들어가 어떤 권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신학자로서 학교에, 그리고 일상적 삶에 남았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상당수의 민중신학자들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정권의 중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권력에의 투신자들은 노무현 정권의 이재정 신부를 비롯하여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흐름이 분명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득권 세력은 언제나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기득권 세력이 되고자 하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을 하겠다는 암묵적인 욕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권력에 대한 태도를 모색할 필요성을 획득하게 되며, 이것을 위해 우리가 먼저 만나게 될 사람은 벤야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