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과 가족 사진 ©사진출처=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별세했다. 향년 88세. 그는 민주화 이후 처음 집권한 장로 대통령이다. 이런 탓에 기독교계는 앞 다투어 애도 성명을 냈다. 그러나 그가 진정 기독교 정신으로 통치를 했는지는 의문이다.
고인과 관련해 딱 두 가지 일들을 회상하고자 한다. 공적인 지면에 개인적인 일들을 적어 독자들이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자 개인의 기억은 그 당시를 살았던 또 다른 수많은 ‘개인들’이 비슷하게 겪었던 기억임을 밝혀둔다.
# 회상 1.
1994년 남북 정세는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당시 기자는 군 복무 중이었다. 1994년 핵 위기로 인해 한반도에서는 전운이 감돌았고,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자국민 소개령을 내리며 전쟁 태세에 돌입했다. 그러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적극적인 중재노력에 힘입어 한반도는 가까스로 전쟁위기를 피해갔다. 화해의 훈풍은 급기야 남북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한 데까지 이어졌다. 특히 이 합의는 남북의 최고 지도자가 한국전쟁 이후 처음 만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상징성은 대단했다.
그러나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 주석은 그해 7월8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정상회담을 불과 17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후 찬바람이 불어왔다. 서거한 김 주석에게 조문을 가느냐를 놓고 우리 사회는 한 바탕 논란이 일었고, 김영삼 정권은 여기에 편승해 대대적인 공안몰이에 나섰다.
이 와중에 당시 군 복무를 하던 모든 장병들을 요새 유행하는 말로 ‘멘붕(멘탈붕괴)’에 빠뜨리는, 그야말로 희대의 망언이 불거졌다.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 신부가 “군대에도 주사파가 있다”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발언을 한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 특히 여당 의원들의 막말에 가까운 발언에 비하면 박홍 총장은 애교 수준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 발언 한 마디는 무서웠다. 모 일간지엔 이등병 계급장을 주사기로 묘사한 만평이 게재됐었다. 군에 입대하는 신병 가운데 주사파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만평이었다.
당시 기자는 갓 상병 계급장을 달았다. 군 생활이 평탄대로로 진입하나 생각했지만 ‘사회’에서 몰아닥친 공안 광풍으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 한 번은 헌병대에서 내무반 압수수색을 나오기도 했다. 하급자 몇몇은 겁에 질리기도 했었다. 국가권력이 한 인간의 인생을 옥죌 수도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 회상 2.
군복무를 마친 뒤 학교로 돌아갔다. 4학년이 되면서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해나갔다. 1997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해 11월 IMF금융위기가 터졌다. IMF금융위기 이전 대학가는 평온했다. 사실 1990년대 후반부터 취업관문이 좁아진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작부터 취업을 준비해왔다면 무난히 취업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기자의 경우,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이런저런 이유로 병역을 면제 받은 친구들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IMF금융위기는 달랐다. IMF금융위기 때 직격탄을 맞은 계층이 여럿 있었다. 대학졸업반이 그 중 하나에 속했다. 그동안 성실하게 취업을 준비했던 학과 동기들은 갑자기 갈 곳이 없어졌고, 이후 상당 기간 동안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기자가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했기에 망정이지, 그 길이 아니었으면 어떤 운명을 맞이해야 할지 몰랐다. 공교롭게도 김 전 대통령의 사망일인 11월22일은 IMF금융위기를 선포한 날이기도 했다. 참 얄궂다.
1994년 공안정국과 1997년 IMF금융위기는 김영삼 전 정권 당시 불거진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국가가 모든 국민의 삶을 다 챙길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국가가 국민들의 일상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장로’라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정치를 해나가야 한다. 이런 면에서 김 전 대통령은 기독교 정신과 거리가 멀었다. 개인적으로 좋지 않았던 과거를 들고 나와 고인을 폄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안몰이와 IMF금융위기로 인해 피곤한 운명을 맞이해야 했던 국민은 너무나 많았다. 역사는 ‘수’의 문제임을 기억하자.
김 전 대통령 이후 우리나라는 또 한 명의 장로 대통령을 맞이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과 다르게 개신교계의 노골적인 지지에 힘입어 집권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앞으론 개신교 장로가 대통령 입후보 자체를 못하도록 법으로 막아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