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너지 효과의 가능성?
남북 당국회담 실무접촉이 11월 26일 판문점에서 열린다. 이번 접촉을 통해 당국회담이 성사되면, ‘8.25 남북합의’의 6개항이 일단 모두 이행되는 셈이다. 따라서 당국회담은 남북관계를 다음 단계로 진입시키는 중요한 회담이 된다.
그동안 북한이 이와 관련된 우리의 거듭된 제안(9.2, 9.24, 10.30)을 받지 않은 것은 내부적으로 당창건 70주년 행사(10.10)에 주력하면서, 한미 정상회담(10.16)과 한중일 정상회담(11.1)이 만드는 흐름을 보고 나름 적절한 시기를 찾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8.25 합의’ 이행 의지와 대남관계 개선 의도는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 당창건 행사 축포로 쏠 것이라던 ‘인공위성(장거리로켓)’발사를 유야무야시켰고, 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과 다양한 분야의 민간 교류 등 ‘8.25 합의사항’ 이행에 협조했다. 최근 개성공단 남측 관계자를 출입 제한하려다 바로 번복한 일도 있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북한은 ‘8.25 합의’ 이래 대남도발을 삼가면서 남북관계에 조심스럽게 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박근혜 대통령도 최근의 통일준비위원회 회의에서 같은 취지의 언급을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방북을 추진하고 있다. 반 총장의 방북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추진 사실은 유엔 대변인이 공식 시인(10.18)한 바 있다. 방북 예상 시기에 대해 뉴욕과 베이징의 소식통들이 엇갈린 소식을 전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평양과 유엔 사이 필요한 사전 조율이 어렵사리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언급을 자제하고 있으며, 반 총장 측과 사전협의를 한 기미도 없다.
반 총장이 남과 북 사이의 당국회담 추진 움직임을 알지 못하고 남북관계를 중재하겠다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까? 남북 당국회담과 반 총장의 방북은 서로 시너지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엇박자로 보일 것인가? 반 총장이 이 시기에 북한을 방문하여 얻어낼 수 있는 긍정적 메시지가 과연 있는 것인가?
내외 여론은 반 총장 방북에 대해 미지근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곱지 않은 시선도 더러 섞여 있다. 11월 중순 발생한 파리 테러사태로 국제사회가 전대미문의 위기와 혼란에 빠져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웬 평양 방문이냐는 의견으로부터, 평양에 가려거든 반드시 북한 핵문제와 인권 문제에 진전을 가져와야 한다는 으름장도 있고, 반 총장이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고 있는 만큼 이런저런 정파적 이해관계 속에서 경계의 눈초리도 만만치 않다. 과연 반기문 총장의 방북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반 총장의 방북이 의미를 가지려면
반 총장은 취임 이래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필요한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을 누차 밝혀온 바 있다. 지난 5월 서울에 오는 길에 개성공단을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막판에 북한이 입장을 번복하여 성사되지 못한 일도 있었다. 따라서 이번의 방북 추진에 새로운 기획의도가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반 총장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사무총장이다. 개인 역량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그는 대한민국 성장과 성공의 상징이다. 대한민국은 유엔이 만들고 지켜준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싸웠고 지금도 틈만 나면 유엔사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북한 핵문제와 인권문제가 불거진 이래 유엔은 대북제재 결의를 쏟아내고 있고 북한은 이를 미국의 일방적인 대북 적대정책에 유엔이 휘말려든 결과라며 반발하며 각을 세우고 있다. 북한은 유엔 회원국이면서도 유엔과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이런 인연을 감안하면 반 총장과 김정은 제1위원장의 만남은 남북정상회담 보다 의미심장한 단층을 포함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의 방북은 이번의 기회가 무산된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반 총장의 방북이 성사되면 1979년 발트하임 총장과 1993년 갈리 총장의 방북에 이어 유엔 사무총장으로 세 번째이지만, 북한으로서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정치권에서 차기 대선과 관련하여 신경 쓰는 것처럼 북한도 그의 방북으로 김정은 제1위원장의 국제적 입지를 높이는 효과보다 심리적⦁정치적으로 파생될 수 있는 역효과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나 남한에서 이와 같은 국내 정치적 고려가 실제로 개입된다면 반 총장의 방북은 추진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 총장의 방북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산되는 것보다 성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반도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 제고, 평화문제 논의의 유발, 북한과 유엔과의 관계 정리, 통일환경의 조성 등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지쳐 있는 남북관계에 생동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도 놓치기 아까운 기회이다.
반 총장의 방북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려면, 그가 한국인이 아니라 철저하게 유엔 수장의 자격과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본인은 물론 북한도 우리 정부도 각별히 유념하고 남과 북의 언론도 조심해야 한다. 반 총장은 남북회담의 대표로 방북하는 것도 아니며, 같은 모국어를 쓰는 동족을 친선방문하자고 방북하는 것도 아니다. 유엔과 북한이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북한과 국제사회가 건설적인 소통과 이해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유엔 총장의 기본적 임무이자 북한에게는 의무이다.
반 총장 방북의 과제, 유엔의 임무와 북한의 의무
북한 외무성 리흥식 순회대사는 11월17일 유엔 북한대표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현재 유엔과 북한의 상호관계는 좋지 않다며 반 총장의 방북이 성사된다면 한반도 상황을 개선하고 유엔과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반 총장과 김 제1위원장이 만나면 평화문제와 인권문제는 피할 수 없는 의제다.
유엔 총장은 북한의 비핵화와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유엔의 거듭된 대북결의들을 존중하고 이행할 것을 북한 최고지도자에게 직접 요구하고 북한에게도 발언기회를 주는 무대가 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반 총장의 방북만으로 풀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김 제1위원장이 반 총장과 만나는 자체가, 유엔이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을 회피하거나 항의하는 단계를 벗어나, 논의(discuss)할 수 있다는 입장의 변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입장이 없이 반 총장을 평양에 초청할 수는 없다고 본다.
최근 북한은 핵과 인권문제에 대해 회피적 방어 자세에서 탈피하여 적극적으로 정면 돌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당창건 70주년 행사 이래로 기회만 있으면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을 요구해왔다. 평화체제 문제보다는 핵문제에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외부 지적에 대해서는 ‘평화문제와 핵문제에 순서타령을 하는 것은 문제의 배경도 모르면서 대북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소리’라고 하여(11.13, 외교부 대변인), 핵문제에 가려져 있던 평화문제를 정면으로 끄집어내려 하고 있다.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그동안 회피하거나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던 입장으로부터 최근에는 국제사회의 북한인권 논의의 장에 적극 참여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자신들을 변호하고 외부의 지적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지만 북한 인권문제 논의의 틀을 인정하고 이에 참여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주목된다.
이와 같은 분위기와 움직임을 감안하여 반 총장의 방북에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나 유엔사무국의 국제인권 담당 고위관리가 수행하거나, 서울에 설치된 유엔의 북한인권사무소 대표가 동행하는 문제를 과감히 추진해 볼 수도 있겠다.
북한이 요구하는 평화문제는 핵문제는 물론이지만 인권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핵과 평화문제가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점은 국제사회의 더 많은 이해가 요구되며 인권과 평화가 연관된 문제라는 것은 북한의 깊은 이해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1994년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와 2005년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 등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거의 주요한 합의내용을 보면 북핵문제는 한반도 평화체제 및 미북관계 개선과 깊이 연관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선후문제는 있었지만 평화문제와 비핵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달성되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인권문제가 평화문제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제기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권침해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의 최고책임자에 대한 사법처리를 권고한 것으로 유명해진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의 작성을 주도한 마이클 커비 위원장은 보고서 발표 직후 ‘인권문제가 적어도 북한의 경우에는 평화문제와 긴밀히 연관돼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북한의 인권침해 책임자를 법정에 세우는 법적 조치와 평화체제를 만드는 정치적 조치는 불가분의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라고 언급한바 있다.(2014.4.15., 경향신문) 실제로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 권고사항의 맨 마지막에는 ‘한국전쟁의 관여국가들과 유엔은 고위급 정치회담을 개최하여... 유엔헌장의 원칙에 따라 한국전쟁을 평화적으로 최종 정리하는 협정을 비준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밖에 반 총장의 방북 시 과제로서 한반도 관련 대화를 주선하는 것과 억류된 한국인들의 석방을 중재하는 일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대화는 당사자 사이에 접점이 찾아지고 있다. 그러나 미북대화에 대해서는 미국이 ‘전략적 인내’라는 대북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반 총장이 끌어낼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반 총장은 핵문제보다는 인권문제에 주력할 가능성이 크고, 그런 점에서 현재 북한에 억류중인 한국인 3명의 석방문제에 대해 모종의 역할도 할 것을 기대해 본다. 1954년 함마슐드 초대 유엔사무총장이 중국을 방문하여 현지에 억류되어 있던 미국인의 석방에 역할을 한 사례도 있다.
남북한은 물론 국제사회 모두가 반 총장의 방북이 실현되어 긍정적인 성과가 나오도록 협조하고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히 북한은 유엔헌장의 정신과 국제사회의 일반 규범을 준수하는 유엔회원국으로서의 면모를 정립하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 그것이 한반도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