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베리타스 DB |
여는 말
지난 11월22일 별세한 거산(巨山) 김영삼 대통령은 전직 국가 원수인 이승만, 장면, 윤보선, 김대중처럼 기독교인이었고, 이들 가운데서도 기독교 신앙심이 돈독한 지도자였다. 거산은 장로대통령으로서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1987년 펴낸 『신앙강론집: 정직과 진실이 승리하는 사회』(여수룬)에서 나타나는 바 같이 군사독재와 정치적 사회적 부패가 난무하던 시절 “정직과 진실이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온 삶을 송두리째 바쳤고 민주화와 부패척결을 이루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새벽을 깨운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는 국정의 고비마다 믿음에 의지했던 ‘크리스천 대통령’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신앙적 정치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귀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거산의 좌우명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다. 거산은 평소 이 문구를 휘호로 쓰면서 “모든 일에 정당하다면 거리낄 게 없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가 걸어온 길도 그랬다. 독재·기득권의 벽에 몸으로 부딪쳐 가며 정면 승부를 펼쳐온 우파 민주화 진영의 중심축 대통령으로서 “정도(正道)를 걷고 당당하게 대도(大道)를 가겠다”(1994년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시 분할론’을 부인하며)고 피력하였다. 거산이 자신의 몸을 던진 민주화 투쟁으로 인해 유신(維新)시대가 막을 내렸으며, 암울했던 군사독재 정권이 종말을 고했다. 미 대통령 빌 클린턴이 1993년 7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거산은 그와 조깅을 함께 하고, 조찬을 겸한 단독회동 뒤 자신이 직접 쓴 휘호 ‘大道無門’을 선물했었다. 우리는 그 분이 보여준 불굴의 반독재투쟁 정신과,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한 대도무문의 삶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한다. 대도무문의 정신은 그의 삶의 다음 다섯 가지 족적(足跡)으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I. 민주화의 상징: 의회민주주의자
거산은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절 비폭력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거목이었다. 의회민주주의가 권위주의에 눌려 신음하던 시기에 독재의 그늘은 언젠가는 우리 사회가 걷어내야만 했던 굴레였다. 거산은 1963년 군정(軍政) 연장 반대 집회로 수감된 이후 일관되게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다. 거산은 1961년 5·16 이후 ‘공화당 창당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받았을 때 “군(軍)의 정치 참여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 참여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절했다. 다원성을 근간으로 하는 의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이 투영된 결과였다. 그는 1970년 9월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DJ)과의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지만, 결과에 승복했다. 그 뒤 나온 것이 “김대중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라는 거산의 지지 연설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의 3선개헌 반대 투쟁 중엔 초산 테러를 당했고 1979년엔 의원직 강제 제명을 당했다. 암울했던 시절 이 사건은 부산·마산의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유신정권이 끝나는 계기가 됐다. 1983년엔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신군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23일간의 단식 농성으로 정국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거산은 상대적으로 열려 있던 정치 공간을 파고들어 국회에서 민주주의의 ‘영지’(領地)를 확장해 나갔다. 물꼬가 트인 민주화의 거센 흐름은 결국 1987년 6·29 선언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민주화 투쟁의 기나긴 여정에서 한 번도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투쟁했지만 출구 없는 대결이 아니라 절충과 타협으로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은 성공했고 그 중심에 김대중과 그가 있었다. 일부 세력이 섣부른 민중 봉기나 혁명을 주장하며 다른 길을 주장할 때 그가 택한 ‘선거 혁명’은 의회주의자로서의 그의 통찰력을 드러냈다. 점진적 개혁주의자로서의 그의 면모는 군인 정권의 중심이었던 민정당과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야당 진영에 함께 몸담았던 이들로부터 비난과 비판도 받았으나 이 3당 합당이 결국 군정(軍政) 종식과 ‘문민정부 탄생’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를 놓고 거산은 오히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거산은 본격적인 한국 지방자치 시대를 열어젖힌 대통령이었다. 유권자가 시·도지사 등 단체장까지 직선으로 선출한 것은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최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지방의회가 해산 된 후 우여곡절 끝에 지방자치가 완전한 형태로 부활하기까지는 거산의 노력이 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마지막 남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떠났다”고 술회했듯이 민주화 부분에서 큰 족적을 남기면서 온갖 고통을 감내한 그가 없었더라면 산업화·민주화의 동시 성취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도 ‘절반의 성공’에 그쳤을 것이다. 거산은 우리 사회 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이룩한 정치지도자였고, 최초의 문민정부를 연 대통령이었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넘어가면서 동남아·남미·아프리카 등 다른 나라에선 수도 없이 벌어진 헌정(憲政) 중단, 쿠데타 같은 혼란 없이 연착륙할 수 있었던 것도 온건적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거산(YS)과 김대중에 힘입은 바 크다. ‘YS는 못말려’라는 YS 풍자 바람은 정치권 전반을 대상으로 퍼져 서적은 물론 TV와 라디오 개그프로그램 코너로 꾸며지기도 했다. 이 같은 풍자는 ‘문민정부’ 슬로건에서 보듯 일반 국민이 자유롭게 정치를 논하고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됐다. 이러한 민주화와 의회민주주의 사상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영향 받고 자라난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정의 사상에 기반한다.
II. 신념의 정치인
거산은 위기를 기회로 삼은 ‘타고난 승부사’로서 자유와 민주를 온몸으로 쟁취한 지도자였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거산은 1979년 유신정권에 저항하다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을 당했다. 제명당하면서 그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정치적 명언을 남겼다. 1983년 신군부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거산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 단식투쟁을 하던 자신에게 해외 출국을 권유하던 5공 독재정권을 향해서는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저항했다. 그는 암울한 신군부 시절 다음같이 그의 민주화 신념을 피력했다: “나를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갈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을 말이야, 내 양심을, 마음을, 이 전두환이가 뺏지는 못해. ... 김영삼이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바른 길, 정의에 입각한 길, 진리를 위한 길, 자유를 위하는 일이면 싸우렵니다. 싸우다가 쓰러질지언정 싸우렵니다.”
한때 정적(政敵)이었으나 말년엔 서로 의지했던 3김시대의 마지막 한 명인 김종필(89·JP)은 22일 아침 거산의 빈소를 찾아 “애석하기 짝이 없다”며 “신념의 지도자로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이 자리에서 JP는 거산에 대해 “하여간 신념의 분이야. 신념으로 못할 것, 어려운 것 다 헤치고 오늘에 이른 분이야. 다른 사람 못하는 일을 하신 분”이라며 평가했다. 그의 대도무문의 신념은 기독교 신앙에서 온 것이다. 그는 구약성경 이사야 41장 10절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였다.
III. 용기와 결단의 정치인
거산은 대통령 재임 기간 하나회 청산과 금융실명제 도입, 역사 바로 세우기 추진, 전방위 부패 척결 등을 실행하였다. 거산은 정치적 고비마다 승부수를 던졌다. 복잡미묘한 정세를 단순화해 정면돌파하는 거산의 스타일은 ‘결단의 리더십’으로 불렸다. 하나회는 육사 11기부터 36기까지 기수별로 10~12명의 엘리트 장교들로 구성됐었다. 5·6공 정부 시절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요직을 독차지했다. 하나회 청산은 거산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회원이었던 수방·특전사령관이 전격 경질되는 등 군 수뇌부 교체 인사가 이어졌고, 12·12 및 5·18 인맥 숙정과도 맞물려 YS 정부 출범 초기 100일 동안 대장 7명을 포함해 19명의 장성이 전역 조치됐다. 군부 정치 사조직 하나회에 대한 전광석화 같은 해체 조치였다. 아직 군정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고 있던 그때 김 전 대통령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아니었다면 우리 군 전체를 휘어잡고 있던 하나회를 없애는 일대 단안(斷案)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결단 하나로 우리나라는 군부 정권이 다시 들어설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다. 2008년 11월 우석대 초청 강연에선 재임 시절 업적이었던 ‘하나회 청산’에 대해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용기와 결단 역시 그가 “내가 너를 붙들리라”는 하나님에 주권에 대한 신앙에서 나왔다고 본다.
IV. 청렴한 정치인
거산은 생전에 “정치인이 부를 축적하면 부덕하다”는 신념을 자주 피력했다. 그의 측근들은 거산은 정치자금이 들어오더라도 주변 정치인에게 나눠줘 본인에게 남는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거산은 지난 1993년 대통령 취임 뒤 첫 국무회의에서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 도입을 역설했다. 그리고 부친과 자녀의 재산까지 먼저 공개하며 솔선수범했다. ‘부패와의 전쟁’ 역시, 우리 역사를 바꾼 획기적 조치였다. 현재 일반화된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는 당시 그가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가장 먼저 공개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거산이 대통령 취임 후에 안팎의 많은 반대와 우려 속에 강행한 금융실명제는 이제 우리 경제의 건강과 질서를 지켜주는 튼튼한 버팀목이 돼 있다.
다음 같은 어록이 거산의 청렴성을 말해준다.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이다.” (1993년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이라도 받지 않을 것이다.” (1993년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 정치자금을 받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면서)
“새 정부에 있어 국가기강 확립의 대도(大道)는 하나도 윗물 맑기요, 둘도 윗물 맑기다.” (1993년 국가기강확립 보고회의에서 고위공직자의 청렴성을 강조하면서)
“로마제국은 외침이 아니라 내부 부패로 망했다.” (1994년 인천 북구청 세무비리 사건에 대한 엄단을 지시하면서)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김대중과 달리 거산은 음식에 큰 관심이 없었다. 청와대 메뉴도 칼국수에 마른 멸치와 고추장을 곁들인 정도였다. 김대중도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대접받았다. 하지만 나오는 길에 곧장 아귀찜을 먹으러 갔다. 청와대에 밥 먹으러 갔던 사람들 사이에 “양이 적다,” “맛이 없다” 등의 말이 많았다. ‘칼국수’로 유명한 청와대 메뉴는 소박하고 서민적인 김 전 대통령을 이해하는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거산은 권력을 남용한 아들을 구속한 현직 대통령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다”(1997년 차남 현철씨의 한보사태 이권개입 의혹에 대해). 그만큼 그는 법질서를 겸허하게 준수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거산은 지난 2008년 부친상 때도 수많은 조문객을 받으면서도 조의금을 일절 받지 않는 등 돈에 대한 평소의 철학을 실천했다. 실제로 거산은 상도동 자택을 빼고는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경남 거제도의 땅은 김영삼 민주센터에, 거제도 생가는 거제시에 기부했다. 상도동 자택도 손명순 여사 사후에는 소유권이 김영삼 민주센터로 넘어간다. 거산이 기부한 재산은 52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청렴한 정치와 삶 자체가 세계내적 금욕주의를 추구한 칼빈주의적 청교도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그가 몸담은 보수교회가 칼빈의 장로교회였고 청교도적 삶을 강조했기 때문에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공직자로서는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V. 청교도적 신앙의 정치인
1. 3대째 기독교 신앙을 이어받은 기독교인: 정직과 진실이 승리하는 사회 추구
거산은 조부 때부터 3대째 신앙을 이어받았다. 그는 부모 덕분에 어린 시절 예수님을 영접했고 주일성수를 지켜온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6·25전쟁을 겪었으며 어머니를 간첩 공비의 총탄에 잃었다. 유년기에는 신명교회에 출석했으며 중학교에 진학해 부산으로 유학을 가서는 부산남교회에 다녔다. 대학시절에는 서울 신암교회에 나갔다. 거산은 1951년 3월 경남 마산 문창교회에서 손명순(87)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거산은 정계에 진출한 뒤에는 보수파 기독교에 속한 서울 충현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도와 예배를 게을리 하지 않은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또한 기도를 할 때는 매번 종이에 자필로 기도문을 써서 읽는 등 항상 준비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겼다. 정치에 투신한 이후엔 꺾이지 않는 집념과 신앙의 투지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인 국가조찬기도회와 국회조찬기도회 탄생에 기여했다. 거산은 이들 기도회가 시작된 1965년부터 기도회에 동참한 ‘초대 멤버’였다. 거산은 자신의 기독교 신앙관을 담은 책자도 출간했다. 1987년 펴낸 『신앙강론집: 정직과 진실이 승리하는 사회』이다. 255페이지 분량의 책에는 그가 품은 역사의식과 일평생 추구하려 했던 기독교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 대도무문의 신앙으로 정치활동: 교회 아닌 하나님의 주권만을 신뢰
거산은 그의 독실한 신앙이 인정받아 충현교회 장로로 선출되었으며 민주화 운동으로 가택연금을 당했을 때 성경을 읽으며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가 당시 독재정권에 저항을 한 진보진영의 교회에 나갔다면 그는 정치적 행보에 있어서 교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가 신앙생활을 한 충현교회는 교회의 정치적 참여에 대하여 금기시하거나 또는 권력지향적 입장을 보인 보수교회였기 때문에 그가 만일 진실한 신앙이 없었더라면 그는 교회를 떠나갔을 것이다. 당시 군부정치의 삼선개헌과 10월 유신, 신군부로 이어진 암울한 정치적 권위주의 시대에 교회의 주일설교나 목회방침이 이를 거부하지 않고 암묵적으로 용인했기 때문에 박해받는 야당 당수에게 신앙적 위로와 격려를 주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도 당시 그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거산은 세상적 대가나 위로를 받기 위하여 교회에 나가지 않았고 오로지 3대째 내려온 가계의 신앙에 따라서 그리고 부인 또한 독실한 신자로서 오로지 하나님의 의만을 추구하고 신앙생활을 했고, 신앙의 힘을 정치적 신념인 대도무문의 좌우명으로 승화시키며 정치적 투쟁을 이어나간 것이다. 또 신군부시절 민주화를 위한 23일간의 단식 투쟁 역시 성경을 통해 영감을 얻었고 신앙의 힘을 의지하며 극복했다. 그는 생전에 “신앙인으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5.18 3주년을 맞는 때에 가택연금된 후 민주회복, 정치복원 등 5개항을 내걸고 23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인 것도 기억될 만한 일”이라 회상했다. 이 단식으로 인해 민주화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게 되었다.
당시 담임목사나 보수교회는 야당당수인 그에게 큰 힘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거산은 아예 교회를 자신의 정치적 야망실현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던 것이고, 하나님은 이러한 그의 신앙을 보시고 그를 큰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가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갖은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교회의 힘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깊은 기독교 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거산의 정치적 삶에는 그가 강대상에서 선포된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설교를 듣고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수주일하고 예배를 소중히 하고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청교도적 정신이 배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청교도적 개혁정신
한국현대사에 남겨진 고인의 선명한 족적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산이 추구하려 했던 메시지가 곳곳에 녹아 있다. 거산은 유신 시절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자 남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만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당시에 선언했던,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그 후의 단식을 회상하며 술회한 “단식투쟁을 통해 대통령을 하겠다는 욕심을 완전히 버렸고, 이런 생각을 버리게 해 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다”(1985년 한국일보 인터뷰), “단식 이후 마음을 완전히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설산을 바라보니 더 비워야겠다는 아쉬움이 살아나는 것 같다”(1987년 지리산 등반 중 기자회견에서) 등에는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굴종하지 않고 진리와 의를 위하여 순교하고 고난받고 인내하여 쟁취하는 역사적인 개혁신앙의 정신이 암묵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앙의 가정에서 성장한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식’ 전에도 서울 자택에서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거산이 대통령 당선 직후 과거 대통령의 별채로서 고급요정인 궁정동 안가(安家)를 철거한 일도 잘 알려져 있다. 궁정동 안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연예인 등을 불러 놓고 술을 마시다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 12채의 안가가 있었는데 과거 대통령이 재벌과 여자들을 불러 들여 술을 마시면서 정치자금을 상납받기도 한 곳으로 “한마디로 밀실정치와 공작정치의 본산”이었다. 거산은 이곳을 “악과 부정부패의 상징”으로 보았고, 취임 후 가장 먼저 추진한 일 중 하나가 안가 철거였다고 회고했다. 안가가 들어섰던 만 9백평 부지에 새로 공원을 조성했다. 거산은 청와대 “5년 동안 금욕생활”을 했다고 회고했다. 점심을 10일 중 8일 정도는 칼국수를 먹으니 청와대 식대가 1/4로 줄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거산의 개혁정신은 17세기 영국 크롬웰의 청교도적 개혁정치를 연상하기도 한다.
4. “신(新)한국”의 구현 추구: 정의와 진리가 승리하는 사회 실현
거산은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청와대에 예배실을 만들어 가족예배를 드렸다. 그는 청와대에서 해외순방을 나가서도 현지 선교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주일성수를 지키는 참된 신앙인이었다. 거산은 1993년 5월 대통령 취임 후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해 한국교회의 자성과 회개를 촉구했다. 거산은 “교회와 기독교인 스스로가 사회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기에 앞서 스스로 오염돼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 특히, 기독계에서 일대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거산은 대통령 임기 시에도 중대한 결정을 할 때마다 가까운 목회자에게 기도를 요청했으며, 생전 늘 신앙을 강조해 왔다. 거산이 가장 좋아했던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야 41장 10절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는 국정에서 혼란을 겪을 때에도 이 말씀을 붙잡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그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한없이 따뜻한 정치 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한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눈물과 땀이 필요하다. 고통이 따른다. 우리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1993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그리고 가족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까지 그가 즐겨 불렀던 찬양은 “나의 갈 길 다가도록”(384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280장)이었다. 이 찬양들은 거산에게 등불이자 간증이었다. 2015년 4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33회 4·19혁명 국가조찬기도회”에 건강 문제로 참석하지 못해서 김덕룡 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장이 대독한 격려사에서 “대한민국이 세계사의 당당한 주역으로 우뚝 서는 것이 저의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했다. 이어 “요즘 우리 국민이 꿈과 용기,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어 참으로 가슴 아프다”면서 “여러분의 절실한 기도가 이 나라에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불굴의 신앙인이었던 그가 한국교회에 전한 최후의 메시지다.
맺는말
거산은 워낙 건강관리에 철저해 몇 해 더 사실 줄 알았는데 이른 감이 있어 아쉽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대도무문의 좌우명을 실천함으로써 군사독재정권과 투쟁해서 종식시켰다. 그리고 1992년 대통령에 당선돼, 32년간의 권위주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켜서 대한민국 전반에 변화와 개혁을 주도함으로써 나라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대통령 재임 중에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공직자 재산 공개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를 견고한 반석위에 올려놓은 점은 그 어떤 통치자도 이루지 못한 희생과 결단의 결과물이었다. 임기 말 외환위기에 따른 IMF구제금융 신청 사태는 그의 이력의 그림자다. 하지만, 국민에게 공과(功過)가 비등한 대통령이라기보다 ‘공’이 더 많은 대통령이었다.
거산은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이 땅에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심고 꽃피워 열매를 맺은 위대한 지도자로, 그분의 희생과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각계는 거산의 마지막 유언처럼 당부하신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마음 깊이 새겨, 국민의 고통을 덜어 주는 정치, 우리 사회의 상처를 치유하고 갈등을 봉합하는 일에 가일층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신앙적 지도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젊은 세대 가운데 앞으로 거산을 본받는 많은 신앙적 정치인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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