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2월이 되면 전세계의 이목은 아카데미 영화제로 쏠린다. 사실 아카데미 영화제는 오로지 미국 영화만을 위한 축제다. 헐리웃이 세계 영화 시장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제 자체가 훌륭한 쇼비지니스인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임박해 오면 오스카 트로피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두고 호사가들은 입방아를 찧는다. 그와 동시에 비판의 목소리도 불거져 나온다. 영화제가 보수적이고 백인 중심주의, 심지어 귀족적 속물근성에 매몰됐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런 비판은 일정 수준 아카데미 영화제의 일단을 보여준다. 백인 중심주의라는 비판만 봐도 그렇다. 덴젤 워싱턴, 모건 프리맨, 할 베리, 포레스트 화이테커 등 흑인 배우들이 연기상을 받았고, 2014년 제86회 시상식에서는 흑인 노예 솔로몬 노섭의 기구한 사연을 그린 <노예 12년>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내년이면 88회를 맞는 아카데미 역사 전체에서 볼 때 흑인 배우들의 부상과 <노예 12년>의 수상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2010년 이후 아카데미 남녀 최우수 주연상은 백인 일색이다.
이런 아카데미가 에드워드 스노든의 내부고발을 그린 다큐멘터리 <시티즌 포>(원제 : Citizen Four)에 이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줬다. 연출자인 로라 포이트러스는 수상 소감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언급했다. 시상식 무대엔 그녀와 함께 스노든을 취재했던 <가디언>의 글렌 그린월드도 눈에 띠었다. 그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스노든의 내부고발은 단순히 사생활 침해의 문제점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의 민낯을 드러냈다."
아카데미상 사례를 들먹인 이유는 부산국제영화제(아래 영화제) 때문이다. 부산시는 지난 12월11일(금)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BIFF) 집행위원장과 전, 현직 사무국장을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부산시는 감사원의 고발 통보를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영화제 쪽 입장은 다르다. 영화제 쪽은 15일(화) 보도자료를 통해 "부산시의 이번 고발조치는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상영에 따른 명백한 보복"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이 같이 밝혔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재정의 많은 부분을 스폰서십에 의존한다. 연간 30~40억원 규모다. 스폰서를 유치한 사람에게 사례비를 준다. 사례비 집행의 기록이 미비하다는 것이다."
영화제 쪽 입장도 다르지 않다. 영화제 쪽은 "감사원의 지적은, 협찬을 유치하고 협찬 중계수수료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협찬 중계활동을 증빙하는 자료가 미흡하고 일부 행정 착오에 따른 과실을 지적한 것"이라며 "감사원 감사에서 부산국제영화제와 비슷한 지적을 받은 기관이나 단체의 경우 통상적으로 시정요구나 관련자 징계 등 행정처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감사원에서 유독 부산국제영화제만 수사기관에 고발하라고 요구하고 부산시가 이를 강행한 것은 집행위원장을 밀어내려는 보복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부산시의 집요한 영화제 흔들기
부산시의 영화제 흔들기는 사실 새삼스럽지 않다. 2013년 부산시와 영화제 측은 <다이빙벨> 상영을 둘러싸고 대립해왔다. 당시 영화제 조직위원장이던 서병수 부산시장은 "정치적 중립을 훼손할 수 있는 작품을 상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상영에 반대했다. 이어 2014년 1월엔 이용관 집행위원장에게 사퇴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영화계는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이러자 부산시는 한 발 물러섰다. 올해 영화제는 강수연 공동 집행위원장 체제로 치렀다.
다시 <시티즌포>를 살펴보자. <시티즌포>는 현 오바마 행정부의 ‘역린'을 건드린 영화다. 스노든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정부의 기밀을 폭로하기로 마음 먹은 계기는 전임 조지 W. 부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오바마 정부의 행태였다. 스노든의 폭로로 오바마는 '조지 W. 오바마'라는 비아냥에 시달리며 단단히 체면을 구겼다.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아카데미가 오바마를 한 번 더 ‘확인사살'한 것일까? 아카데미는 이 영화에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줬다. ‘진보'와는 거리가 먼 영화제임에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바마 행정부가 아카데미 영화제 관계자들을 뒷조사(?)했다거나 사퇴 압력을 가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번엔 <다이빙벨>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다이빙벨>의 주제는 잠수장비 ‘다이빙벨'이다. 이 작품은 "‘다이빙벨'을 참사 현장에 투입했으면 희생자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을 던진다. 이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가 언급되고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이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잠깐 등장한다.
그러나 정권 퇴진을 요구한다든지, 관계자를 문책하라는 식의 급진적인 메시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사고를 줄일 수 있는 1%의 가능성이 남았었고, 실제 현장에 다이빙벨이 투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유형무형의 방해공작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흐를 뿐이다. 이런 영화를 조준해 부산시장이 ‘정치적 중립'을 운운하고, 감사원이 나서서 전방위적 압박을 가하니, 외압 의혹이 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 정부들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는 상황이다. 작품을 통해 박 대통령을 풍자했던 이하 작가는 올해만 4번 기소를 당했고, 결국 이 작가는 잠시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전단을 뿌리고 검찰과 경찰을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했던 ‘둥글이' 박성수 씨는 대구구치소에서 8개월째 구속 중이다.
설혹 영화나 다른 예술장르가 권력의 심기를 건드려도 이를 관용하는 게 민주사회의 미덕이다. 심지어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도 천민인 광대들이 마당극을 통해 양반을 마음껏 조롱할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묻고 싶다. 나라 안팎에다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왜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려 하는가? 지금 대한민국의 표현의 자유는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