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철'이다. 흔히 '시즌'이라고 하는데, 굳이 영어 낱말을 쓰고 싶지 않아 이렇게 쓰려 한다. 또 성탄 철이라는 생소한 낱말을 쓰는 이유는 늘 이맘때면 거리는 성탄 트리로 뒤덮이고 언론, 특히 방송에서는 성탄 특집을 쏟아내서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지금 당장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는 예수를 알아볼 수 있을까?
너무 잘 아는 이야기를 다시 되짚어 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출생이 초라했다면 죽음은 비참했다. 예수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인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 '당했다.' 그의 죽음은 종교적이라기 보다 정치적이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탄절을 맞아 예수 탄생과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곱씹고 있을까? 단언컨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가 이 땅에 남긴 삶의 발자취를 기억해 내고, 오늘에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지금의 들뜬 성탄 분위기는 아무 의미 없다.
예수는 가난한 모습으로, 그리고 외침 보다는 속삭임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교회는 '사회지도층'이란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부유층들을 반긴다. 또 외치는 구호는 너무 요란해 당장 내일이라도 무시무시한 심판이 임할 것만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이 주인 되는 천국 복음을 설파했다. 그러나 교회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듣기 좋은 설교만 늘어 놓는다.
어디 그뿐일까? 예수는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외면 당하고 있다. 예수는 중산층(목수)이긴 했지만 고학력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다. 로마의 압제에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대하던, 어느 면에서 신비주의마저 엿보이는 메시아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 전통에 빚지고 있음을 기억하자. 예수 역시 유다 공동체의 아들이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분기점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12월9일(수) 로마 교황청이 "신학적으로 유대인들이 하느님 구원의 참여자"이며 "유대교는 단순히 다른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이라고 선언한 점은 반갑기 그지 없다.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어떤가? 고학력 사회가 되다 보니 예수는 메시아로 볼 것 같지도 않다. 특히 한국교회는 고학력 엘리트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예수가 온다해도 평신도들이 그냥 놔두지 않을 것 같다.
곳곳이 아픈 대한민국, 아픈 이들과 함께 울자
지금 세상의 모습은 어떤가? 얼마 전, 이 나라 최고 명문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니던 학생이 이른바 '금수저'로 요약되는 부의 대물림에 염증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면 세상은 참 기막히다.
지난 해 4월16일 속절 없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600여 일이 지난 지금까지 왜 자식을 잃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 달라고 울부짖는다. 지난 14일(월)부터 16일(수)까지 3일간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 특조위) 청문회가 열렸다. 이 청문회에서 구조책임을 져야했던 해경 간부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여기서 그치면 모르겠다. 정부와 집권 여당은 아예 세월호 특조위를 무력화시킬 기세다. 세월호 참사가 지난 해엔 '어느 누구도 이 나라에서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웠다면, 지금은 '국가는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지 않으며, 일어난 참사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시켰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지금 예수가 이 땅에 오신다면 어떤 표정 지을까?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서 각 기관과 교회마다 행사로 분주하다. 그러나 거리로 내몰린 이웃들은 관심 밖인 것 같다. 이러다보니 성탄절이 왜 '시즌'이어야 하고, 왜 '즐거운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인사말을 주고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는 당분간 없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전혀 기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 예수께서 당장 이 땅에 오신다면 생일이라고 즐거워하시기에 앞서 제주 강정(해군기지), 밀양(송전탑), 진도 팽목항과 서울 광화문 광장(세월호), 국가인권위 전광판(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 등등 거리에 내쫓겨 슬피우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슬피 우셨을 것이다.
이번 성탄절은 기뻐하기 보다 슬피 울자.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성탄절을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