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6일까지 이어지는 성탄절기의 밤이 깊어간다. 서울 구치소의 하늘에도 어둠이 내린다. 서울 하늘 아래 어느 곳보다 구원의 염원이 간절할 이곳에 성탄절기 내내 자그마한 전등 하나도 하늘을 향해 켜져 있지 않다. 형광등 불빛만 땅을 밝히는 현실이 대변하듯이 바쁜 업무 때문이든지, 혹은, 한 교도관이 말했듯이, "(성탄트리를 만들) 분위기가 영~ 아니잖아요?" 때문이든지, 혹은, 성탄트리를 세우는 일이 이제는 의미 없는 형식적인 작업일 뿐이라는 판단 때문이든지,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어쨌든 현재는 차갑고 어두운 밤이다.
하늘마저 얼어버린 듯 자그마한 온기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이 정녕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거나 흔히들 말하듯이 저조한 경기 때문일까? 70-80년대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를 거쳐 올 때도 거리마다 성탄 캐럴이 울려 퍼졌고 교회들은 새벽송을 다녔던 기억에 비추자면, 오늘의 이 상황은 아무래도 위의 이유들 때문이 아닌 듯하다. 그러면, 교세의 위축을 그 이유로 거론할 수 있을까? 교세의 위축은 이미 수치로 증명되고 있지만 현재의 상태는 성장기였던 70-80년대에 비하더라도 위축이라기보다는 조정 단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혹시, 지난 130여년간 생활 속에서 복음이 실천되어온 결과로 굳이 성탄트리를 세우지 않더라도 성탄의 기쁨을 이웃들과 자연스럽게 나누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베풀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눅4:18) 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있지는 않으니 그 추측은 행복한 상상에 불과하다.
아무래도, 성탄절기에 교회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와 함께 하는 일들이 줄어든 것은 복음에 대한 자신감의 약화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몇 목회자들의 윤리적 타락, 교회의 행정도 일반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논리에 따라 처리되어버리는 세속화, IS와 같은 극단적인 종교집단의 준동과 다원주의적 세계관 등이 기독교의 복음정신을 희석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이 때문에 교회가 거대한 성탄트리 뒤에서, 차갑고 거창한 대리석 성전 건물 안에서나 성탄송가를 부르며 교인들끼리만 그 성탄의 기쁨을 나누게 된다면, 그리고 그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한 것으로 그 기쁨을 나누었다고 자화자찬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의미를 축소하여 기독교를 게토화시키는 일이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와 함께 나눌 때 그 의미가 구현되며 복음에 대한 자신감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성탄절기에 표현할 수 있는 복음에 대한 자신감이 성탄트리라는 장식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 시청 앞에 거대한 성탄트리가 설치되어 있지만 그것을 두고 복음에 대한 자신감의 반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북한의 백화점에도 성탄트리는 전시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형교회들 앞에 설치된 거대한 성탄트리나 화려한 조명도 하늘로부터 차별 없이 임하는 구원의 선물을 기뻐하며 영접하는 표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 화려함과 거대함은 오늘날 들판에서 자던 '목자들'로 하여금 성탄의 기쁨에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로 기능한다. 다만, 장식일 뿐인 성탄트리의 부재가 교회들이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와 적극적으로 함께 하지 않음을 폭로할 수도 있는 현실이 우려스러운 것이다.
교회가 복음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면 구치소의 어두운 하늘과 같은 미래만 교회 앞에 놓여있게 될 것이다. 교회는 세속화의 과정 속에서 종교의 지위마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과정에 들어서지 않으려면 복음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생활 속에서 그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복음에 대한 자신감은 교회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와 함께 하기 때문에 더 가난해지고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서 함께 구타당하고 눈먼 자의 지팡이가 됨으로써 더 초라한 환경 속에 거하게 될 때 확인된다. 이처럼 복음은 구원의 길을 알려주므로 그 복음을 실천으로써 증거할 때 그 증인들이 사회와 교회를 살아있도록 만들게 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의 퇴락이 현상적으로 드러나더라도 교회는 복음이 그러한 현실조차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들의 입을 통해 "주의 은혜의 해(눅4:19)가 선포되는 현장에서 더 자주 발견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