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예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더욱 깊게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를 가르치신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기도를 통하여 열리고 지속된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은밀하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히 보시는 주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시면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공동으로 함께 기도해야할 내용들을 가르쳐 주신다. 필자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명하면서 새해 초두 우리의 기도가 더욱 깊어지기를 원한다.
I. 주기도문(마 6:9-13, 눅 11:2-4):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문
주기도문은 산상 설교의 중심이며 핵심이다. 주기도문의 각 구절에 마음을 열고 이 기도의 정신에서 살아 나갈 때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설교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은밀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도를 공동으로 드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a; 눅 11:2).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은 먼저 기도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면서(마 6:5-8) 주기도문을 기도의 길잡이로 가르치신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 한 곳에서 개인적으로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의 기도하는 법에 관한 질문을 받으시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주기도문"(Vaterunser, Lord's Prayer)이라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가 드리는 기도다. 누가가 기록한 전승된 주기도의 내용을 마태는 7가지 청원기도로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처음 3가지와 끝에 첨가된 1가지 청원은 하나님과 직접 관련되는 내용이고 중간에 이어지는 4가지 청원은 우리와 관련되는 부분이다. 주기도를 구성하는 두 부분의 상호관계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 사이의 관계에 비교된다. 십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으뜸 계명을 펼쳐 놓은 것 같이 주기도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다.
3세기 교부 키프리안(Cyprian)은 주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도문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영과 진리 안에서'(요 4:23) 예배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그분은 이 말씀들을 우리에게 선물하셨고 이 말씀들로 우리에게 성령을 선사하신다"(De dominica oratione, 2, in Thasci Caecilii Cypriani Opera omnia, CSEL II, 1, 265-94). 주기도는 개인적 기도인 동시에 신앙공동체의 기도다. 주기도는 가족이나 사회계층, 남녀노소와 모든 문화와 국가와 인종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다. 이처럼 주기도는 모든 경계를 뛰어 넘어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만든다.
II.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기도하는 자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πατήρ ἡμῶν)라고 부르도록 인도하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b).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요구하시면서 제자들을 자신이 갖는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끌어 들이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어린이가 가장 친근하게 부르는 용어인 "아바"(αββα, abba)라고 호칭하였다. "아바"(막 14:36)는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르는 아람말이지만 우리말 "아빠"하고는 다르다. 우리 말 "아빠"는 어린 아이의 친밀성을 표현하지만 존경감은 없다. 그러나 "아바"는 천진난만한 친밀성과 아울러 존경하는 마음이 배제되지 않는다("아바" 용어 해설, Stuttgarter Erkläungsbibel. 해설 관주 성경전서, 37).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보통 쓰이는 용어는 '아브'인데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당시 하나님 관념으로는 파격적이었다.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πατήρ σου, your father)요 "우리 아버지"(πατήρ ἡμῶν, our father)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을 하나의 새로운 토대 위에 세우시며 동시에 그들을 특별히 은총을 입은 자들과 사명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로 결속시키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마치 우리 육신의 아버지에게 구하듯 신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누가는 이 좋은 것을 "성령"(the Holy Spirit, Πνεύμα Άγιος)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 되시는 분이시다.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자신을 우리에게 기꺼이 내어 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게 하신다. 우리 기도가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복이나 소원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기도란 우리의 소원을 정화하고 바로 잡는 법을 배워가는 길이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 즉, 그의 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Reinhold Schneider, Das Vaterunser [Kolmar: Alsatia, 1941]; 6. Auflage [Freiburg: Herder, 1947, 1979]).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빌립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에게 요청한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이에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시다.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다.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하여 두 가지를 가르쳐 주고 계신다.
첫째, 아버지는 창조주로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우주만물과 모든 유형과 무형의 존재는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다. 인간은 그의 형상으로 진흙에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나의 아버지는 될 수 없다. 유일하신 독생자이신 예수만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호칭하며 우리는 입양된 형제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우리 아버지"라고 호칭할 수 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είκὼν τοῦ θεοῦ, image of God, 고후 4:4; 골 1:15)이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의 모습을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 영의 가르침을 좇음으로써 성화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육신의 소욕은 죽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III.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1. 하나님의 인격 그 자체가 우리 기도의 대상
주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난다. 우리 기도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인격 그 자체가 주 대상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마 6:9c). 제자들이 청원해야 할 본래적인 첫째 관심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비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가 세상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 스스로가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 "거룩하게 하다"는 거룩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을 뜻한다. 예언자 에스겔은 포로되어 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6:23);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38:23).
2. 여신상은 성경적 하나님 상에 배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아니시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여성적 비유는 있으나 여신은 없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그의 모성적 성품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rahamim)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히브리어 단어 '라하임(rahamim)은 본래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으로 나중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 하나님의 자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모태는 어머니와 아기의 긴밀한 연결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 66:13). 육체에서 빌려온 이 상징 언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품고 있는 그분의 마음을 깊이 이해시켜 주는 선물이다.
여신(goddess)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교회의 주변에 많았다. 여신들은 신과 세계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상징은 성경의 하나님상(像)에 배치(背馳)된다. 여신들은 범신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구별이 사라진다. 이런 사고에서는 플로티누스(Plotinus)처럼 세상과 사물과 인간이 존재의 태(胎)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기도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은 여신들을 배격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피조물에 대한 초월적인 주권을 나타낼 수 있었다. 신구약 성경에서 "모성애"라는 표현은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나 "어머니"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호칭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여신(a female diety)이라는 단어는 없다.
3.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다
이 청원 기도에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호렙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부르신 모세에게 계시하셨다.
구약성경에 신의 이름이 직접 언급된 경우는 주로 야웨(YHWH)와 엘로힘(Elohim)이 사용되는데, 야웨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등장한다. 성경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출애굽 사건 이전까지 고대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엘(El)이라는 최고신을 섬기고 있었으며 그 신의 이름이 '엘로힘'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성경에는 '엘 샤다이'(El Shaddai·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출 6:3), '엘 엘리욘'(El Elyon·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 14:19), '엘 로이'(El Roi·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3) 등 '엘'에 대한 다양한 호칭이 나온다. 이처럼 엘로힘은 야웨라는 이름(神名)이 등장하기 전까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던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이 엘 신을 폐기하고 야웨 신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엘이 야웨 안으로 통전적으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야웨라는 이름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하나님(Elohim)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Yahweh)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a). 모세는 그의 민족을 구출하러 그를 이집트로 보내시는 하나님에게 이름을 묻는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יהוה, Yahweh, Jehovah, YHWH)시다.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탁월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본질을 묘사하는 이름, 하나님의 고유명사, 또는 4자음의 이름, 즉,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4자음 YHWH를 말한다) 등으로 불렀다. 히브리 구약성경을 전수한 유대 마소라 학자들은 성경을 베껴 쓸 때에 이 거룩하고 신성한 이름을 나타내는 네 자음을 그대로 쓰기는 했지만 그것을 발음하지는 않았다. 단지 이 네 글자의 하나님 이름(YHWH)이 나올 때마다 그냥 '주' 또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모음 부호인 '아도나이'(אֲדֹנָי, adonai)를 발음했을 뿐이다. 19세기 히브리어 학자 게제니우스는 "아도나이"(Adonai, 주)와 "엘로힘"(Elohim,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대체하는 모음자는 이러한 대체 발음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마소라 본문에 의해 삽입되었다고 선언하였고 이러한 추측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H. W. F. Gesenius, Gesenius's Hebrew-Chaldee Lexicon to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79]; [1847], 337).
오늘날 개역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은 본래의 자음들과 대체모음들의 혼합물이다. 70인경(the LXX)은 모세오경을 번역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그대로 발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주'(主)라는 뜻의 '퀴리오스'(ὁ Κύριος, kyrios)로 번역했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야웨(여호와)로서 모양도 없고, 신화가 없고, 성(性)이 없는 인격적인 존재다.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 동사 '하야'(hayah) 동사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동사의 본래적 의미는 떨어지다(fall), 생기다(befall), 되다(become), 생존하다(be, exist) 등이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과거부터 시작해서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즉, 과거 언젠가 다른 신으로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며 결코 창조된 적이 없는 하나님을 의미한다(출 3:14). 이 이름을 이사야서에는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고 했으며, 신약성경에서도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자"로 소개하고 있다(계 1:8).
4. 하나님 이름을 헛되어 사용해서는 안 된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신명기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사람들이 자기 유익을 목적으로, 또는, 남을 속일 목적으로, 또는, 농담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을 욕설로 사용하는 것도 이 계명에 걸린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며 우리 삶과 생각과 행동의 모든 영역에 침투해 감찰하시며 현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시 139:1-5).
5.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도록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고 가르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윤리와 도덕을 도외시한 사업 번영이나 출세의 길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되게 한다. 세상에서 착한 행실을 하려고 할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욕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하는 일을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저들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이 선행이요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주님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b). 우리의 말이 소박하고 품위가 있어야 하고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서 성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같이 권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