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북한의 3대 세습, 체제의 문제에서 비롯된 가난과 질병, 독재와 속박, 그리고 지속적인 핵개발 의지와 핵실험을 바라보면서 북한을 보는 남한 주민들의 시선은 더욱 싸늘해졌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과연 북한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의문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고 분개하는 기독인들이 주변에 많은 것도 사실이다. 북한에 대해서 기독교인조차도 공의와 사랑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 14-21)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분명 교회는 세상의 길과 다르게 가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과 달리 북한을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원수 사랑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교회가 북한정권을 저주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학교의 통일교육이 북한정권을 저주하는 방향으로만 전개되는 것 또한 기독교학교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물론 북한을 제대로 알고 안보를 튼튼히 강화하며 의식무장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강구해야 한다. 그 하나님이 역사하시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주린 북한을 먹이고 목마른 북한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북한정권을 저주하기보다는 그들이 하루빨리 체제를 변화시키도록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이 진정 북한의 개혁개방을 이끌고 변화를 가져온다면 더할 나위없고, 설령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이후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그 정권을 다스리실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에서의 통일교육은 이러한 성경말씀에 바탕을 둔 북한관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실향민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서울의 전통 있는 큰 교회의 현충일 기념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예배 후 행사로 6.25 참전 노장군의 연설이 있었고, 군악대의 공연이 있었다. 군인들의 합창은 장엄하고 힘이 넘치며 우렁찼다. 그런데 공연 중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라는 군가가 합창되었을 때, 순간 여기는 군 연병장이 아니고 교회인데 당혹스러웠고 무엇인가 혼란스러웠다. 예수는 사라지고 없고, 교회는 단순한 공연장소가 되어 그 본연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날 공연의 레퍼터리는 보다 신중히 검토되어야 했었다고 생각한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이 사라지는 순간 교회는 단순한 건물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법칙에 함몰되어 영원히 갈등하는 이 세상을 위해, 예수는 그 누구도 제시 못한 '원수사랑'이라는 특별 처방전을 주셨다. 사람들이 이 처방을 따르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진정한 평화는 저절로 오게 된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진정한 평화 만들기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분노에 사로잡혀 예수의 가르침인 '원수사랑' 정신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교회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예수가 그 속에 이미 없기 때문이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길에 버려지듯이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 아니, 이미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상스러워져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
개신교 신자 수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고, '개독교'로 불리면서 조롱당하고 있다. 권위를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에서 그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 조롱받는 교회가 힘이 없는 상황에서 사랑과 공의와 평화가 넘치는 통일된 나라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교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있어야 통일노정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교회는 보다 교회다워져야 하고 기독교 학교는 보다 기독교 학교다워져야 하고, 기독교병원은 영리추구를 벗어나 보다 기독교병원다워져야 그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기독교 학교에서의 통일교육은 사랑과 화해에 바탕을 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통일교육에서 '원수사랑'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그 학교의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상징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