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덴 덴젤은 최근 크리스천포스트에 기고한 글 "탕자의 비유, 인물 셋, 교훈 셋"에서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 인물이 모두 우리의 인간형을 반영하고 있으며 각 인간형에 따른 세 가지의 교훈을 우리에게 안겨준다고 주장했다. 기고문 전문을 번역해 나눈다.
예수께서는 바삐 돌아다니는 반항아로부터 자기 의로움이 뚝뚝 흐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필요에 대응하는 법을 알고 계셨다. 우리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다양한 상황과 여러 층위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얼마나 많이 배워야 하는지를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들려준 비유(눅15:11-32) 속에 나오는 탕자와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과 각각 연관되어 있다.
첫째, 돈으로 살 수 있는 온갖 죄스런 쾌락을 부단히 경험하고자 하는 아들이 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 중에서 자신의 몫을 요구했고 그것도 즉시 줄 것을 원했다. 그 문화에서 한 가족의 아버지가 건강한 상태에 있는데 아들이 이런 요구를 한다는 것은 최고의 불경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는 황금거위를 좇아서 난봉을 부리려는 생각을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흔히 그렇듯이, 그도 돈이 소진되고 나서야 자신이 육욕을 좇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좋은 상황이었는지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우리는 가끔 충동적이기는 하다. 우리는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현실보다는 환상에 뿌리박은 결정을 하게 된다. 탕자는 자신의 환상을 좇았지만 그 환상적인 꿈은 결국 악몽으로 변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제 정신이 들었다"(눅15:17).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버리고 왔던 모든 것들과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눅15:18)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시쳇말로 그는 "바닥을 쳤다." 그래서 하늘을 쳐다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 폭발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지점이다. 아들이 집으로 향했을 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눅15:20).
어떤 정죄도 없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게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잖아"라며 손가락을 흔들지도 않았다. 그저 순수하고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있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의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가없는 사랑을 지시한다.
만일 오늘 당신이 자신의 인생에서 밑바닥에 있다하더라도 낙심하지 마라.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어 당신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위안과 용서를 찾으라고 권하고 있다. 당신은 실제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당신은 실제로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영접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만족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쾌락을 좇고 있다면 이것을 기억하라: 진정한 평화는 소유나 정욕이나 돈으로부터 얻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와 창조주와의 의미 있는 관계,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의미 있는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 앞에 진실을 두고서 왜 가짜를 좇고 있는가?
이 비유의 세 번째 인물은 형이다. 그는 가족 구성원, 즉, 더 푸른 초원을 찾아서 자신의 터전을 벗어나 방랑하지 않는 크리스천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것은 형에게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문제들은 자신의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에 부각되어 드러난다.
아버지가 그 탕자를 위해 커다란 잔치를 벌이느라 바쁜 와중에 형은 이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성이 나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쨌건 동생이 바깥에서 허랑방탕하는 동안 자신은 집에 머물며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잔치나 벌이고 다니던 녀석을 주빈 대접을 한단 말인가?
그가 아버지에게 불평을 터뜨릴 때 그로부터는 자기 의로움이 쏟아져 나온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29-30).
사랑은 없다. 동정심도 없다. 감사도 없다. 그저 분노와 이기심만 있다.
이것이 삶에서 감사와 은혜보다는 교만이 넘칠 때 드러나는 인간 심정의 속성이다. 우리 각자는 바른 길에서 벗어났다가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만일 우리가 유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탕자의 형처럼 반응하게 되지 아버지처럼 반응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탕자처럼 세상에서 죄를 좇든지 그의 형처럼 집에 머물면서 죄를 짓든지, 매 한가지로 어려운 유혹을 당한다. 만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면 나는 탕자로부터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용서와 관용을 원한다면 나는 아버지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큰 죄인"이 너무 많은 자비를 누린다고 느낀다면, 나는 그 형의 화난 반응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크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주의를 요하는 문젯거리들을 갖고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주님 앞으로 가져와야 할 죄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비유의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도움으로 변화되어 새롭게 시작하기에 늦는 법이란 없다는 메시지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필요가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 세 인물들 중 어느 인물이 오늘 당신의 모습과 가장 부합하는가? 당신은 죄스런 환상을 좇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자만심에 잠겨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을 기억하라: 그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문제만일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집에 있는 사람들 각각을 사랑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그럴만하다고 느끼던 느끼지 않던 당신은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당신이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이 비유의 아버지가 보여준 공감과 지혜를 경험하게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희생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 잠길 때나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에 대응하는 법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필요한 지점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그 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기사출처: http://www.christianpost.com/news/3-characters-3-lessons-from-the-parable-of-the-prodigal-son-155252/#2RQmGMuEg3AUWptp.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