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90주년을 맞으며 “3.1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천주교의 입장에서-
김 홍 진 신부
1. 들어가는 글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기억을 통해 과거를 현재화하며, 상상력을 통해 현재에 미래를 상상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사고는 시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한계성 속에서 시간을 넘나들기에 초월성을 지닐 수 있다. 개인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개인의 주관적 사고의 총체적 집합이기에 때로는 각색 또는 왜곡하여 기록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국가나 민족의 역사는 그것이 비록 개개인의 기억에 각인되어 후대에 전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객관적 사실에 의한 정당한 평가와 판단에 의해 객관화된 역사적 사실로의 가치를 지닐 때만이 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개개인의 개인사이건 한 나라의 역사이건 세계사이건 그것들이 자기합리화나 미화의 수준에서 각색되어진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닌 단지 조작된 허구로서의 가치없는 이야기로만 남을뿐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역사적 사건들을 그들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그러한 기억을 현재화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구세사의 대장정을 걸어왔다.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불순명, 배반, 부끄러운 행위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그들이 숨겨야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반면교사로서 그들이 뛰어 넘어야 할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웃 나라들에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모습을 언론매체를 통해 가끔 접하게 된다. 이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 딴나라의 왜곡된 모습일까? 불행하게도 그것은 이 땅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지는 않을지?
과거를 올바로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과거를 반복하는 벌을 받는다.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읽고 역사를 통한 교훈을 간직하고 기억하여 현재화 하고, 그러한 것을 토대로 내일을 준비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앞길은 커다란 희망과 발전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천주교회가 지난날 일제 식민치하에서 어떠한 삶의 궤적을 그려왔는가를 조망해보는 것은 내일을 향한 한국천주교회의 이정표를 제시할 수도 있는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2. 초기의 한국의 천주교회와 종교의 자유
한국의 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 귀국하여 함께 천주학을 공부하던 지인들에게 세례를 주어 초기 교회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정조 9년,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을 발단으로 하여 이 땅의 천주교회는 창립 초기부터 근 100여년간을 엄청난 박해로 말미암은 시련기를 겪어왔다.
이후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서 제한적이나마 종교활동에 자유를 갖게 되어 그동안 계속된 모진 박해로 말미암아 지하에 잠적하여 있던 조선천주교회는 조심스럽게 부상하여 1899년 3월 9일 조선 정부와 교민조약(僑民條約)과 1904년 선교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천주교회는 정교일치의 국가 권력에서 해방되어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때 조선 정부와 한국천주교회는 정교분리 원칙을 문언(文言)으로 규정하였다.
3. 일제의 조선 강점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동양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동양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점차 조선을 통째로 손아귀에 넣고자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1905년 7월, 당시 일본 총리였던 가쓰라 다도와 미국 대통령의 특사였던 태프트 육군 장관이 소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미국이 일본의 조선지배를 묵인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이어서 8월 제 2차 영일동맹조약을 통해 영국과 러시아로부터 일본이 조선에 대한 보호국의 권리를 승인받았다.
1905년 11월 9일 조선에 입국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며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다 황제가 끝내 이를 승낙하지 않자 방향을 바꾸어 여러 대신들을 소집하여 조약체결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1월 17일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학부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의 찬성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보호국으로 전락한 셈이었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에서 ‘조선은 자주적으로 외교업무를 담당할 만한 능력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는 취지의 조약으로 금후 일본정부가 조선의 외교에 관한 사무를 지휘ㆍ감독하며, 통감(統監)을 임명하여 조선 정부의 외교를 관할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4. 일제하의 조선천주교회
1906년 2월 초대 통감인 이등박문은 개신교의 선교사들에게 “한국 정치는 통감이 맡고, 정신적 교화는 종교가 맡는다”라는 감언이설로 역할분담론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저의는 교회 세력을 정치권으로부터 철저히 차단하려는 속셈이었다.
1906년 10월 19일, 조선천주교회는 경향신문 창간호를 통해 정교분리원칙을 선교정책으로 발표하였다. 이는 교회는 고유한 선교활동에 전념할 뿐 정치적인 문제는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이의 근본취지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기나긴 세월 동안 박해의 체험을 가진 조선천주교회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석연치 않은 정교분리원칙을 공표하였지만 이로써 일제의 정치적 술수에 말려들어 일제의 식민지 지배 통치를 묵인, 방조, 비호하는 정도를 넘어 동조와 협동, 봉사와 충성을 서슴치 않았다. 또한 조선천주교회는 신자들에게 반침략운동을 금지할 뿐 아니라 심지어 단죄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방인 성직자와 신자들은 무력항쟁 또는 온건한 방법 등 여러 가지 형태로 투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의 특성상 주교만이 교회의 공식적인 태도로 간주하려는 사회인식 때문에 조선천주교회가 당시 일제에 맞섰던 민족운동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일제하 조선천주교회의 선교를 담당하던 선교단체는 빠리외방전교회, 독일 베네딕토회, 미국의 메리놀외방선교회, 아일랜드의 골롬반외방선교회였다. 당시 이들 선교사들은 제국주의 국민들이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선교지였지기에 그들은 한국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문에 조선천주교회의 통치권자들은 선교지의 정치적, 사회적 구원의 문제보다는 조선인 개개인의 영혼이 더 큰 관심사였다. 따라서 그들의 성속이원론적인 신앙구조는 독립운동을 세속의 문제로만 보았기 때문에 조선인 성직자와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정치행위로 단죄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민족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교회중심주의, 선교를 우선으로 하는 선교우선주의, 조선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보수적인 자세를 가진 것은 빠리외방전교회의 최대 과제가 방인 성직자를 양성해서 조선인들로 구성된 자치적인 교계제도를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로마 교황청의 바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조선천주교회는 프랑스의 종교보호정책 때문에 프랑스 정부의 보호를 받았다. 또한 당시의 조선천주교회의 통치권자였던 뮈텔 주교는 항상 그의 모국인 프랑스의 정책과 궤를 같이 했다. 프랑스가 친러배일(親露排日) 관계에 있을 때에는 뮈텔 주교 역시 그랬다. 1907년 프랑스는 불일협정(佛日協定)을 체결하고 일본의 한반도 소유를 용인하였다. 뮈텔 주교는 친일노선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고, 정교유착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교분리 원칙을 결정함에 있어 모국 프랑스 교회의 상황도 한몫을 했다. 1905년 프랑스 교회는 정부와 정교분리 정책을 체결하였다. 교황 레오 13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반성직주의가 드세어 분리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06년 2월 11일 비오 10세는 정교분리 정책을 단죄하였지만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1911년 6월 11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서품식이 있은 후 16일,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조선 총독 체라우치를 방문한 자리에서 뮈텔 주교는 “천주교는 정치적인 문제에 무관심하고, 나는 항상 일본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나와 우리 모든 신부들의 공통된 생각이고 또한 신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3.1운동 때에 한국 주교들은 한결같이 이 운동을 단죄하였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는 “일본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이다. 우리 가톨릭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친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대구의 신자들에게 만세운동에 가담하면 대죄를 범하므로 지옥에 갈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프랑스 주교들은 일본 제국을 합리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조선을 일본제국의 종속국이 아니라 일본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독립운동을 반정부운동으로 단정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정책을 편것은 이 땅에 교회를 존속시키고 선교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한 궁여지책일 것이다. 그들은 이미 조선교회가 처참한 박해를 경험하였기에 일제의 종교정책을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생각하여 민족의 운명보다는 교회의 운명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결과라 본다.
이상의 논의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주교들의 입장표명에서와 같이 교회의 공식적 입장은 교회의 자체 존립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가 민족 안에 존속하기 위해서는 민족 문화의 수용은 물론 민족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족과 함께 동고동락할 때 비로소 뿌리를 내릴 수 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조선의 천주교회에 비하여 개신교는 20세기 초까지 구국운동에 앞장서고 민족의 주권수호를 위한 교육 계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한반도의 일제 강점기였던 상황에서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경성교구의 뮈텔 주교와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는 시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의 관심의 초첨은 조선인 신부나 신자들이 이 시위에 가담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있었다. 그러나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일부 교사와 신학생들의 조직적인 시위 참가 계획이 발생함으로써 신학교는 6개월 간 휴교하게 되었으며, 서울의 용산 성심신학교에서도 3.1운동에 대한 학교 당국의 철저한 보안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여 다른 신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은율성당의 윤예원신부와 한학만 신부, 안성성당의 공베르 신부 등, 일부 성직자와 많은 신자들이 독립시위운동에 참가하거나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였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지도자 33인을 종교 유형별로 본다면 개신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다. 뮈텔 주교는 표면상 독립선언서에 천주교 신자들의 관련이 없는데 대해 만족을 표명하였다. “올 봄에 독립을 위한 운동이 전국에 걸쳐 일어났는데 이 운동이 대중적이었기 때문에 종교에 몰두한 사람에게는 그 운동을 못하게 하는 데는 거의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우리 가톨릭이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정부에 대해 충성의 좋은 모범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서울교구 연보, 1919년 보고서,153쪽).
프랑스 선교사 주교들은 절실한 민족의 절규와 비폭력적 거사에 대해 일체 외면하였다. 그들이 오로지 선교 목적만을 달성하려는 이기적이고 제국주의적 발상에 매달려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기를 거부하게 되자,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천주교회는 조선 민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1919년의 신자 증가수가 단 12명으로, 신자 자녀의 유아 영세자를 감안한다면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냉담하거나 혹은 해외로 망명의 길을 떠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5. 교황청의 외교정책
뮈텔 주교가 친일노선을 걷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이등박문이 교황 레오 13세를 만나고 난 후였다고 짐작된다. 교황은 1892년 2월 16일 회칙 ‘새로운 근심 걱정 속에서’를 반포하였다. 그 회칙에서 교황은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정교분리를 묵인할 수 없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정교분리가 묵인될 수 있다” 하며 정교분리를 시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권력을 받아들여야 함은 허락될 뿐 아니라 요구되는 일이며, 권력을 낳고 이를 유지하는 사회적 유대관계에 의하여 강요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1919년, 교황청은 일본에 대사관을 설치하면서 조선천주교회까지 담당하게 하였다. 이런 조처는 조선천주교회를 일본교회의 일부로 생각한 것으로 일본의 침략행위를 정당하게 인정해준 것이 되었다. 또한 교황청이 일제의 침략행위를 지지하고 정당화 내지 신성화한 극단적인 표현은 신사참배를 허용한 일이었다.
로마교회는 그의 창립 시초부터 3세기에 걸친 혹독한 박해에 대한 피해의식이 항상 내면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로마교회는 현지 교회와 정부가 대립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와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로마교회는 일제하의 식민상태에 있었던 이 땅의 고통받는 민족의 아픔에 함께 하지 않았음을 통렬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6. 일제하의 조선천주교회의 독립운동
조선의 문호개방 이후 한일합방을 거쳐 광복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서 전개된 한국 근현대사는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의 독립운동으로 특징지워지고 있다. 이는 비폭력적 방법에 의한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교육운동이나 언론결사운동, 식산진흥운동 등과 함께 의병전쟁이나 독립군 항쟁과 같은 무장저항운동의 모습이다.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교육이나 언론을 통한 구국운동과 같은 비폭력적 방법에 의해 국가의 독립을 지켜보려던 운동에 대해서는 지지의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제국주의의 침략과정에서 피침략 국가 민중들의 독립운동은 당연한 것이고 그들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에 있어 교회 당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비폭력적 실력 양성운동에는 지지의 입장을 보이면서도 무장저항운동에는 반대하는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당시 치열하게 전개되는 독립운동에 편승하여 천주교 신자들도 무장저항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의 무장저항운동은 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지지나 지원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장저항운동에 참여했던 신자들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로서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되는데 이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안중근의 의거이다.
조선천주교의 신자들이 주도한 무장독립운동은 조선 본토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음에 비해 주로 만주 내지는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하여 무장항쟁이 전개되었다.
간도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무장항쟁 발생 배경에는 1896년 원산의 베르모렐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김영렬과 그의 동료 12명이 1897년부터 이 지역에서 본격적인 전교를 시작했다. 또한 100년도에 함경남도에서 북간도 용정촌으로 이주한 최문화와 최병학은 443헥타르의 토지를 구입하여 조선인 천주교신자 개척촌을 건설하였고, 대교동에도 역시 천주교 교우촌을 건설하여 1900년에 뮈텔 주교가 간도 지방을 순회할 때 수백 명의 신자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하였다. 또한 천주교회는 간도 지방에서 학교의 설립 등을 통하여 그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또한 간도의 천주교 신자들은 본토와는 달리 개신교와 상호 협동하여 금융기관과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1915년 당시, 간도에서 조선인이 운영하던 금융기관 3개 가운데 ‘흥업회사’와 ‘광동상회’ 두 곳이 천주교와 개신교가 연합하여 운영하던 것이었다.
간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은 바로 이러한 경험을 기초로하여 후일 무장투쟁을 개신교 신도들이 활발히 전개하는 것에 자극을 받아 독자적인 무장투쟁 및 개신교와 협동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1920년 10월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조선인에 대한 학살은 간도에서의 조직적인 저항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이때 일본군은 대교동과 같은 천주교 교우촌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주민을 학살했으며 부녀자를 폭행하는 등의 만행을 자행한 바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자위적 노력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해나갔다. 당시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을 전개하였던 천주교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독립운동에 투신한 신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은 민족주의 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들은 당시에 풍미하던 민족주의 사상을 수용했고, 이러한 민족주의 사상과 자신의 신앙이 상호충돌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기에 개인의 양심적인 차원에서 무장저항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도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무장투쟁의 선구적 사례로는 1907년 정미의병 이후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상태(1864~1912)를 주목할 수 있다. 그의 심문조서에는 종교관계에 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유품 중에 발견된 각종 성물로 미루어보아 그가 천주교 신자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로서 확실한 무장투쟁의 사례로는 안중근의 경우를 둘 수 있다. 그는 1908년 김두성과 이범윤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의 자격으로 의병 전쟁을 직접 전개한 바 있었고, 1909년에는 이등박문을 제거하여 독립 투쟁의 기치를 높인 바 있었다. 한편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은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엇다. 그는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군자금을 모으다가 천주교 신자들이 포함된 관련 인사 160여 명과 함께 체포, 구금되었다.
한편 일제는 안악사건을 ‘105인 사건’과 연계시켜 조작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기당(안토니오)과 안성제와 같은 천주교 신자들이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이기당은 석방된 후 서간도 무송현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광제회를 조직하고 병학교(兵學校)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인 무장항쟁를 시도했다. 그가 조직한 광제회에는 200명 이상의 회원이 있었고, 자치회에는 3,500명 이상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병학교의 생도수는 500명 이상이었다. 이처럼 활발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자 일제는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때 신의주 천주교회의 서병익 신부는 그를 파문하고 축교(逐敎)한다는 사실을 일제 당국에 통고하였다. 이처럼 당시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일제에 대한 무장항쟁이 교회의 존립에 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하고 이데 대해 신자들을 파문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들의 일제에 대한 무장항쟁은 지속되고 있었다. 간도지역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각 종교가 연합하여 참여했다. 1919년 2월 18일과 20일, 국자가 하장리에서 간도지역의 독립운동가 33인이 모여 앞으로 전개될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한 바 있다. 이때의 비밀집회에서는 “간도 내 각 교회와 단체는 서로 단결하고 협력 일치하여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힘을 다한다”고 결의했다. 그리고 이러한 약조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는 “예수교, 천주교, 대종교, 공자교의 각 유력자의 연락을 밀접히 하기를 권유했다. 이 결의에 따라 용정에서 1919년 3월 13일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고, 이 시위에 천주교 교우촌인 대교동의 학교도 정식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이 만세시위를 기폭제로하여 간도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간도 지역에서 전개된 천주교 신자들의 무장항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방우룡(方雨龍)이 대표로 있던 의민단(義民團) 혹은 의민회(義民會)라고 불리우는 단체를 들 수 있다.
상해임시정부에 의해 파견된 왕삼덕이 대한민국 2년 (1920년) 7월 3일, 국민회(國民會), 군정서(軍政署), 신민회(新民會), 의민단(義民團)을 비롯한 16개에 이르는 독립운동 단체를 보고하고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의민단은 북간도에서 천주교인에 의해 창설되었고, 군인은 200명, 무기 200개, 재정 200원으로, 간부로는 방우룡과 김인군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단체는 비록 창설된 지 일천하기는 하나 당시 간도 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 단체였던 국민회와 연합하고 있다는 간략한 기록을 남기고 잇다. 그리고 이 단체의 재정은 천주교 신자들의 헌금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비교적 풍성한 편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의민단은 1920년 10월 21일 이후, 김좌진이 이끄는 청산리 전투에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1920년 10월 29일, 상해임시정부에서도 간도 지방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간북남부총판부’(墾北南部總判部)와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判部)를 설치할 때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방우룡은 간북남부총판부의 부총판으로, 김인군은 참사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의민단은 ‘대한의민회’의 명칭으로 신민단, 광복단, 국민회 등과 더불어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를 구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간도 지방에는 1919년 3.1운동 직후 국민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 국민회의 회원수는 약 800명이었고, 그 구성은 개신교, 천주교, 천도교 신자들이 연합하여 창설한 단체였다.
또한 천주교 신자의 무장저항운동을 논하는 과정에서 안정근(安定根)의 역할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는 안중근의 친동생으로서 1918년 8월 상하이(上海)에서 김규식(金奎植)·서병호(徐丙浩)·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창당하여 김순애(金順愛)·조동호 등과 이사로 선임되었고, 그해 11월 지린(吉林)에서 조소앙(趙素昻)이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3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하여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것을 선포하였다. 1919년 11월 상하이 대한적십자회 정기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신천군 조사원이 되어 국내의 사정을 조사·보고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김병헌(金炳憲)과 함께 간도지역에 파견되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간의 군사통일조정을 위하여 활동하는 한편, 러시아 니코리스크에서 중로연합선전부(中露聯合宣傳部)를 조직하고, 선전지부장이 되어 간도지방의 일본군경을 정찰하였다. 또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결성에 참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22년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한·중 국민의 친선과 대일항쟁을 도모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선전 및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를 전개하였다. 같은 해 5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23년 10월 교민단 의사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1926년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조선사업(造船事業)으로 위장하고 공작선(工作船) 건조에 주력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1939년 6월 지병(持病)으로 고통을 받아 중국에서 은거하다가 1949년 3월 상하이에서 죽었다.
7. 맺음말
조선천주교회의 교도권자들은 일제의 강점에 대해 천주교회의 보존에만 급급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당시 조선 총독 테라우치의 종교 자유의 보장과 선교활동에 협력하겠다는 성명서를 믿고 교회는 총독부의 정책에 맞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는 빠리외방전교회의 교도권자들의 제국주의적 사고에 부합하여 조선 신자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하거나 일제의 정책에 반발하는 항일적인 비판 사항들은 정교분리에 위배되는 정치 참여로 단죄하는 반면, 일제의 정책에 적극 참여하거나 친일적인 활동은 묵인 또는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모순을 가져왔다.
조선천주교회는 일제 강점 초기, 정교 공존 시대를 거쳐 한일합방 이후에는 교회가 정치에 협력하였고,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협력에서 한발 앞서 일제의 야욕에 아무런 대항없이 순종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 이후는 적극적으로 충성하는 교회로 전락하여 민중과는 멀리 떨어져 방향감각을 상실하였다. 때문에 일제 치하의 조선천주교회는 외형상 교계제도는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민족의 독립의지를 방관하거나 창씨개명, 한글폐지와 일어 사용의 강요 등 민족문화의 말살이나 궁성요배, 신사참배 등 반민족적이며 반교회적인 처사들을 받아들인 것은 민족이 교회를 거부하기를 바라는 결과이며, 이를 호도하기 위해 교회도 총독부와 함께 민족을 우민화하여 현세를 포기하고 내세지향적인 방향으로 유도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제에 대항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무장항쟁은 3.1운동 이후 간도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의 무장 저항 활동은 일제 강점기의 전체 독립운동의 과정에서는 극히 일부분의 역할만을 담당한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당시 교회사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볼 때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천주교 신자들의 무장항쟁은 교회 당국으로부터 공식적인 격려나 인정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의 활동은 자신의 양심과 신앙인으로서의 결단을 통해 단행된 것이었고, 천주교 공동체라는 배경에서 수행된 것이므로 한국교회사의 귀중한 일부라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조선천주교회의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교회 보존이라는 자기합리화의 틀에 갇혀 있었기에 민족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또한 비폭력이건 무장항쟁이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하였던 수많은 애국열사들의 피와 땀의 역사를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예언자의 외침은 사라지고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하는 공동체는 아무런 역사적 의미가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고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1항).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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