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90주년을 맞으며 “3.1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 개신교의 입장에서 -
이만열교수(숙명여대 명예교수)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태화관을 포함한 전국 9개 지역에서〈독립선언서〉를 선포하면서 시작하여, 그 뒤 1년여에 걸쳐 한반도와 만주·연해주 등 해외에까지 확산된 거족적인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일컫는다. 50명 이상 회집된 집회만으로 조사된 일제의 축소된 통계로 보더라도, 이 운동에는 ① 1919년 3∼4월 1,214회에 110만 명, ② 1919년 3∼5월 1,542회에 202만 명, ③ 전국 218개 군 가운데 212개 군, ④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45,562명), 피검된 자 46,948명(49,811명), 가옥 소실(燒失) 724채, 교회당 소실 59채, 학교 소실 2개나 된다고 보고하였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1년간 1천만명이 참가했다고 했다.
이 운동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 실의와 좌절 속에 빠져 있던 한국민에게 민족 독립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강점 후 일제는 한국민을 두고 나라를 빼앗기고도 분통해 하지 않는 나약한 열등민족이라고 했는가 하면,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열복(悅服)한다고까지 세계에 선전했다. 3.1운동은 우선 일본의 이러한 선전이 거짓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을 뿐 아니라 3.1운동에 나타난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고 그것을 집약하여 민족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전기를 만들었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한국독립운동과 민주주의운동 그리고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살필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한국독립운동의 측면이다. 3.1운동은 국권강탈 이후 전개된 최초의 전민족적인 국권회복운동으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3.1운동은 한말 국권수호를 위해 전개된 세 흐름의 근대민족주의운동을 하나의 통합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한말의 근대민족주의운동에는 양반층의 척사위정계․개화운동계와 민중층의 반제․반봉건적 민족운동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 초기의 민족운동도 대부분 파생적이며 국지적인 성격을 넘어서지 못했다. 3.1운동은 분열된 민족운동을 새로운 차원의 통합 독립운동으로 승화시켰다. 마치 세류(細流) 지천(支川)이 대하(大河)를 이뤄 대양(大洋)으로 흐르듯이,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이런 역할을 했다. 3.1운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독립운동은 임시정부 운동을 비롯하여 무장투쟁, 의열투쟁, 외교투쟁 및 국내의 실력배양운동으로 새롭게 전개될 수 있었다.
둘째, 3.1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대단히 귀중한 계기를 마련했다. 과거 3.1운동의 의의를 말할 때, 독립운동사적인 측면을 강조했지만,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건국60주년’ 사건과 관련하여 이 점이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3.1운동은 한국의 민주공화정 수립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3.1운동 이전의 국권회복운동은 왕조를 회복하자는 복벽(復辟)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이미 복벽주의를 극복하고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독립운동이 나타났다. 국내의 조선국민회와 대한광복회, 국외에서는 1917년 7월에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3.1운동 지도자들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수립하겠다는 이념은 확연히 드러냈다. 3.1운동의 이같은 민주공화정 이념은 상해 임정을 통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정임>을 명시하는 헌법으로 구체화되었고, 모든 국민이 평등권과 자유권을 가진 주권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셋째, 3.1운동은 세계의 반제(反帝)운동․약소민족해방운동에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후 강대국에 의해 재편된 베르사이유 체제에 도전한 최초의 저항이었으며, 당시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강권(强權)․패권(覇權)주의에 맞섰던 세계사적 운동이다. 그 여파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약소국가들의 독립운동에 미쳤다. 중국의 5.4운동을 비롯하여 인도 국민회의파의 비폭력 독립운동, 인도차이나 반도․필립핀․이집트의 독립운동 등 동방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투쟁은 3.1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얼마나 참여했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가.
우선 3.1운동에 앞서 전개된 2.8독립선언운동은 그 주체가 학우회(學友會)였지만, 송계백·서춘·백관수·윤창석·김도연 등 기독교인의 역할이 컸다. 또 그 배후에는 재일한국YMCA 총무 백남훈이 있었고, 장소도 재동경(在東京) YMCA였다. 이 선언 후, 장로교·감리교는 재일한국YMCA를 중심으로 재일한인교회를 성립시켰다.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공헌한 지도자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을 들 수 있는데 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 대표였다. 그리고 3.1운동을 점화(點火)한 48인 가운데 24인은 기독교인이었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갈 때도 기독교는 적극 참여했다. 3월 1일 첫날 서울 외의 8곳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의주와 평양은 목사들이 주동했다.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될 때, 기독교계의 참여도와 관련하여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 한 연구에 의하면, 운동의 주동세력이 뚜렷한 311개 지역, 340여 회 중에서 기독교 78개 지역, 천도교 66개 지역, 기독교와 천도교 합작 42개 지역이고, 기독교나 천도교가 아닌 지역은 125개 지역이었다. 주동세력이 뚜렷한 311개 지역만 가지고 본다면 기독교는 25% 내지 38%였다고 할 수 있다. 체포․투옥자는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중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하였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였으며,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로 나타나 있다. 총독부 당국의 조사문서에는 기독교인 여부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도 교회사 자료에는 기독교인으로 나타난 경우가 더러 보이는데, 이는 체포되었거나 기소된 자 중에서 기독교인의 수가 증가할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3.1운동 참여에 대한 위의 통계를 당시 한국의 인구와 대비해 보면, 기독교인의 역할이 더 명료하게 나타난다. 당시 한국의 인구가 1,600만-1700만 명 정도였는데, 기독교인은 20만 명을 상회하여 한국 인구의 1.3∼1.5%를 차지하였다. 거기에 비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주동세력의 측면에서는 25∼38%, 체포․투옥의 측면에서는 17∼22%라고 해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체포와 투옥이 선두그룹이나 극렬그룹에서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기독교인의 참여의 성격이 어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광범하였기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에 대해 표적탄압을 자행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교회당은 고의적으로 방화되었고 비신자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29명이 희생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 달이나 늦게(10월 4일 개회) 그것도 그 해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3.1운동으로 '미참'(未參, 투옥상태)한 상황에서 열린 장로교 제8회 총회에서는, 사살․타살 52명(각 노회 보고), 체포된 신자 3,804명(이 가운데 목사․장로 134명 : 장로교 전체 목사․장로 1024명 가운데 13%에 해당)이나 되었다. 총회에 올린 노회의 보고서에는 '대한(조선)독립운동' 혹은 '독립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끝으로 3.1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3.1정신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지역․종교․신분․남녀․연령․이념을 초월한 일치정신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와 함께 3.1정신은 독립정신, 참여정신, 협동․화합의 정신, 세계(동양)평화의 정신임을 알 수 있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선배신앙인들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민족사랑을 일치시키고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자유 평등과 정의 평화를 확장시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가장 먼저 3.1정신이 보여주고 있는, 지역․종교․신분․남녀․연령․이념을 초월한 일치정신은 오늘날 한국의 민족 통일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큰 메시지를 던저주고 있다. 70여년 가깝게 분단되어 있는 한국에 3.1운동에서 보인 일치 정신은 조국의 평화통일의 토대를 구축하는 정신적 기저로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둘째, 계승해야 할 것은 3.1운동에서 보인 독립정신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민족과 국가를 내시고 민족적 개성을 통해 영광받으시려고 하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세계화 시대에 개방화를 통해 이웃과 세계에 대한 화친해야 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민족적인 개성을 매몰시켜 버리고 세계화에 몰입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90년전 민족독립을 성취하려던 선열들의 그 독립정신을 계승하자면, 민족적인 개성과 문화를 통해 세계에 진출하여 영향력을 미치고 그들의 장점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셋째, 참여정신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민족독립운동이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이라고 하여 기피하지 않았다. 19세기 초부터 기독교계에는 정교분리론이 대두하고 있었다. 이는 교회를 독립운동으로부터 분리시켜 고고한 신앙과 내세의 영역으로 두자는 것이었다. 교역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신석구 목사가 그 경우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라는 권유를 받은 신석구는,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할까, 천도교와는 교리상으로 상용(相容)키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하고 고민하였다. 그러나 그는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한 후 2월 27일 새벽에야, "4천 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하는 음성을 듣고 참여키로 결심하였다 한다. 신석구 목사가 천도교와의 합작문제를 놓고 소승적 입장에 섰다고 비판되고 있으나, 이같이 어려운 민족문제를 두고 기도했던 자세와 그 후 감리교 목사로서는 드물게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그의 분명한 태도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민하면서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일치시키며 민족적인 대의에 참여하려고 했다고 본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인들의 입장이 이와같이 참여정신에 투철했을 것으로 보인다.
넷째 협동․화합의 정신이다. 기독교는 처음에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승훈을 통해 천도교와 합동해서 일을 추진키로 했을 때, 더러는 의구심을 표출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은 천도교와 손을 잡고 추진하기로 했다. 이 점에서 민족문제를 두고 대승적인 입장을 취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협동 화합의 정신은 비단 타종교와의 관련에서만 강조될 것이 아니다. 벽을 허물고 협동해야 할 곳이 너무나 많다. 최근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 3.1선언>에서 보인 바와 같이 한국 교회는 진보와 보수가 만나 최대공약수를 만들어내야 할 분야가 많다. 민족문제를 두고 청계천과 서울시청앞 광장이 대립을 벌이고 있었는데 여기 참여한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에게 3.1정신의 협동 화합정신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인가. 기독교계 안에 먼저 화해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최근 경기하강으로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이 때 기독교회가 우리 사회 빈곤층에게 어떻게 협동 화합의 정신을 실천력으로 보여줘야 할 것인가는 자명하다.
다섯째 3.1정신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세계(동양)평화의 정신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 나라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짓눌러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3.1정신과 배치되는 것으로 당시 한국을 짓누르고 있던 제국주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3.1정신에서 보이는 평화정신은 한국이 독립해야 일본과 동양의 평화도 수립될 수 있고, 나아가 동양평화를 그 중요한 요소로 갖고 있는 세계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봤다. 내 나라의 자존이 중요하듯이 다른 나라의 독립과 평화도 중요한 것이며, 내 나라의 독립이 곧 이웃과 세계 여러 나라에 평화를 갖다줄 수 있다는 것이 독립선언의 정신이었다. 이런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다른 나라를 향해 나눠주고 고통을 같이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보편적 인류애로 접근하는 길이다. 이렇게 하자면 이 땅의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를 품어 안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누려야 할 권리를 향유토록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3.1운동에서 보인 기독교인 민족의식의 성격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적 양심이 결합하여 나타났다고 본다. 이 때 기독교 신앙은 정의․자유․평화에 기반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대에 있었고, 민족적 양심은 자주․평등․해방을 목표로 한 독립국가건설에 있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는 접점에 3.1운동에 참여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주의 신앙'이 서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3.1운동 때에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민족주의적 신앙’은 결코 닫힌 민족주의로 머물지 않고 민족적 개성과 보편적 가치를 연결시켜 주는 열린 민족주의 위에 자리잡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