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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임형진 교수 발제문 전문

 

3.1운동 90주년을 맞으며 “3.1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천도교의 입장에서-

 

임형진(동학민족통일회 사무총장)

 

 

Ⅰ. 서언

 

90년 전 3월 1일 한반도는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진동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부터 10여년을 인고하던 전 민족이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함성의 무리에서는 신분, 연령, 남녀 차이도 없었고, 이념과 종교도 통합되어 있었다.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는 교주 의암 손병희의 주도 하에 교단의 모든 인력과 자금, 조직을 3·1운동에 쏟아 부었다. 운동의 대중화, 일원화(대동단결) 그리고 비폭력이라는 3대 원칙을 정한 천도교는 이에 가담할 세력을 규합하니 기독교와 불교계가 호응했다. 평화적 운동방식을 추진하다 보니 종교계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손병희는 최남선을 시켜 독립선언서를 초안하게 하고 이를 타 종단에 보내 추인을 받았다.

2월 27일 밤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밤새 3만5천장의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한밤의 인쇄기 소리를 수상히 여긴 종로경찰서의 조선인 고등계 형사에게 발각되었지만 의암은 그를 거금으로 매수하면서 민족의 전도를 방해치 말라고 꾸짖었다. 만주로 달아난 그는 후일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는 태극기와 함께 천도교 조직을 통해 전국으로 비밀리에 전달되었다. 드디어 3월 1일, 운동을 전개키로 한 탑골공원에는 엄청난 인파로 붐볐다. 민족대표 33인은 자신들이 그 자리에서 운동을 지휘할 경우 자극 받은 군중에 의한 폭력사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근처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비폭력 원칙의 철저한 고수였다. 잠시후 탑골공원에서도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위대한 3·1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울을 기점으로 한 독립만세의 소리는 전국으로, 3월 말에는 만주, 시베리아, 미주 등 해외에서까지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선언케 했다. 2만여 회에 걸친 시위에 동원인원이 500만 명을 넘었다. 투옥된 조선인이 4만7천여 명에 이르렀다. 운동의 3대원칙 중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운동방식은 세계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비폭력 무저항이 그렇게 큰 힘이었고 고귀했는지는 행하는 조선 민중들도 몰랐다. 그러나 무저항은 만세운동을 잔인하게 압살하던 일제를 무력감에 빠져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훗날 우리의 3·1운동 소식을 접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동방의 등불 코리아, 그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고 찬탄했다. 그 빛은 간디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운동으로 이어졌다. 간디는 영국정부의 통치에 비협력, 불복종, 무저항함으로써 영국을 스스로 굴복하게 만들었고, 1763년부터 시작된 영국의 인도통치를 종식시켰다. 우리의 3·1운동이 없었다면 20세기의 성인 간디도 없었고, 인도의 자랑스런 독립도 불가능했다.

 

Ⅱ. 천도교의 3.운동 준비

 

3대교조 의암 손병희는 동학혁명 이후 관헌의 눈을 피하면서 흩어진 교세를 정비, 동학교문의 재건에 힘써 왔다. 그는 우선 동학재건을 위해 두 가지의 목표를 설정했다. 첫째는 혁명의 과정에서 나타났듯이 남부지방에 비해 북부지방의 교세가 전무했기에 포덕의 우선적 목표를 북부지방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는 혁명의 여파로 인한 남부지방에서의 동학교도 탄압에 비해 상대적으로 북쪽에서의 포덕에는 감시와 지목이 덜한 탓도 있었다. 두 번째의 목표는 역시 혁명과정에서 위력을 절감한 서구문명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제 개화는 시대의 요청이었고 개화를 통한 신문물의 시급한 수용은 민족적 과제가 되었다.

북부지역에서의 동학포교도 그리 수월한 것은 아니었지만 손병희는 동학교문의 재기여부와 존폐의 위기극복을 혁명의 결과로 황폐화한 남쪽의 재건보다도 새로운 북쪽에서 찾아야만 했다. 특히 그는 1890년대말 원산에서 직접 상업과 무역활동을 하면서 한반도의 북부지역에서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각을 거듭하고 있던 계층 즉, 근대적 개혁을 갈구하던 반봉건적 성향의 신흥지주, 상인 및 자작농에 주목하였다. 손병희는 이들을 동학재건의 기반으로 삼고자 북부지역에서의 포교를 시작했다. 그 결과 북부지역의 교세는 1900-1905년간에 급속히 성장되었다.

북쪽지역에서도 평안도에서의 포덕이 크게 성하였다. 그것은 평안도의 지리적 위치가 개화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던 점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척박한 영토로 인하여 지주 소작의 토지갈등이 적었던 즉, 봉건적 요소가 잔존하지 않았다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동학의 반봉건 평등주의적 이념전파가 수월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의암 손병희가 더욱 주목한 것은 문명개화를 통한 자주 자강의 확립이었다. 이를 위해 민도를 높이는 일은 시급을 다투는 민족적 과제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관헌의 지목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 한 후 더욱 굳어졌다. 그래서 손병희는 일본으로 조선의 젊은 인재들을 유학시키고 국내 개혁을 위한 다양한 정책 건의서들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민회 건립과 흑의단발의 생활개혁운동을 추진하니 그것이 갑진개화혁신운동이었다.

그러나 운동과정 중 발생한 사건으로 의암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는 대고천하를 한뒤 본격적인 자주 개화운동에 착수했다. 망명지 일본의 개화된 모습을 직접 보고 온 손병희는 이때부터 우선 무엇보다도 민족계도를 위한 문화사업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망국의 원인이 한마디로 낙후된 민도에 기인한다고 판단, 범국민적 민중교육을 통한 민도의 고양만이 자주독립의 첩경이라고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범국민적 민중교육은 교육사업과 출판문화를 통한 대중계몽만이 가장 실효성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손병희가 귀국하자마자 처음 손을 댄 것이 출판사업과 교육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학교설립과 같은 본격적 교육사업을 전개하기에는 준비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차로 기설 학교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1906년 3월초에 사립보성학교에 80원을 기증한 것을 비롯해서 동월에 서서합동소학교에 40원을 보조하는 등 시내외 각급 사립학교 23개교에 학과정도와 교원․학생수의 다빈에 따라 20원부터 80원에 이르는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후에도 흥화학교와 비파동소재 사립광명학교에 각각 30원을 기증하고, 4월초에는 사립석촌동소학교에 15원을 보조했다. 이처럼 보조를 하게 된 것은 당시 사립학교가 거의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어 학생을 위한 교재무상공여는 물론 교원의 봉급조차 어려운 형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립학교의 보조는 일시적인 찬조로 그치는데도 있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매월 정액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경영난으로 인한 학교폐쇄의 비운을 막는데 뜻이 있었다.

성미제와 五款制 등으로 천도교의 재정형편이 호전되었을 때 우리 나라의 사학운영은 더욱 어렵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1906년 2월에 이미 일제는 국내에 통감부를 설치, 한일합병을 위한 준비공작을 진행시키는 가운데 1908년 8월 8일에는 사립학교령이 선포되고 10월 1일부터 이를 시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보(1908년 12월 6일자)에서 간악한 무리가 일 국민 지혜의 개발됨을 장해코자 하여 이 불리한 법령을 제정했다고 논박하고 있는 점만 보아도 이 교육령이 한국인의 교육기회를 박탈하려는 악법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학경영난은 1910년의 한일합병 이후 더욱 가중되어 갔다. 이에 천도교는 학교의 신규설립보다 경영난에 허덕이는 기설 학교를 인수경영하기로 교육사업의 방향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천도교는 대외적인 육영사업뿐 아니라 대내적인 교육운동 역시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08년 6월 10일 종령 10호에 의한 강습소규정을 공포, 전국 시군에 800여개소의 교리강습소를 설치했는데, 1910년부터는 이의 효율적인 관리운영을 위해 일련번호를 붙여 호칭했고, 또한 동년에 사범강습소를 서울에 설립하는 것 외에 지방 각 시군에까지 확대 실시했다.

민중계도를 통한 자주독립운동은 천도교의 문화사업으로 이어졌다. 이는 의암의 범국민적 민중교육을 통한 민도의 고양만이 자주독립의 첩경이라는 의지의 실현이었다. 천도교의 문화사업은 언론출판문화운동으로 나타났다.

천도교의 출판문화운동은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출판소와 인쇄소 사업이다. 천도교 출발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는 1906년 2월 博文社 설치 이후 普文館, 彰新社, 普成社, 普成館, 昌新館, 普文社, 博文館, 開闢社, 朝鮮農民社 등의 운영이 이에 속하는데 특히 보성사는 최남선이 운영했던 新文館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 출판에 있어 쌍벽을 이루던 인쇄소이며 독립선언서를 제작했던 사유로 일본인에 의해 방화 소실되고 운영 간부진 전원이 구속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둘째, 신문간행사업으로서 萬歲報와 大韓民報를 발행, 자주 자립과 개화의식을 주창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셋째, 잡지간행사업으로 13종 이상의 잡지를 간행함으로써 신문으로 전달할 수 없는 내용의 기획기사 등으로 지식전달과 민중계몽운동에 선구했다.

끝으로 천도교의 종교적 차원에서의 교리문서 간행을 들 수 있다.

 

Ⅲ. 천도교단의 거사

 

1910년대 들어 천도교도의 숫자는 일본측의 기록으로도 3백만을 호칭한다고 기록될 정도로 불어났다. 따라서 일제는 천도교 세력을 단순한 종교세력이 아닌 정치세력으로 간주해 경무국 관할 하에 두어 동향을 예의 주시 했다. 1910년 천도교월보사 간부진이 항일 합방에 반대하는 편지를 각국 영사에게 돌려 구속된 사건이나, 그 이듬해에는 테라우치 총독이 손병희를 직접 불러 천도교의 성미제를 트집잡아 협박과 회유를 하기도 하는 등 천도교는 일제기간 내내 총독부의 주요감시대상인 민족운동집단이었다.

천도교가 구국종교로서 민족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은 1919년 3․1민주혁명에서 타종단에의 자금지원․기밀연락 등 전면적인 주도적 임무를 수행하고, 내부로부터 싹터 성장한 민족의식에 따라 민중을 이끈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운동은 당시 3․1민주혁명을 의식한 것이 아닌 거족적 민중운동을 동학에서의 보국안민적 구국이념에 따라 1910년 9월말로부터 이미 천도교 중진사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천도교의 구국적 신앙에 입각한 대중봉기운동을 동학혁명의 재현과 계승으로 하여 그 이후 1919년 3월 1일까지 근 10년간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특히 1911년의 大韓帝國民力會, 1912년의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1914년의 천도구국단결성 등은 천도교의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천도교도들 사이에는 이미 제1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6년부터 천도교도들을 동원해 독립만세시위의 민중봉기를 일으킬 것을 교주 손병희에게 요청하는 신도가 있었다. 이때에 손병희는 이에 대하여 응답하지 않았다. 1917년에도 같은 압력이 밑으로부터 올라왔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당시 독일이 승세에 있었기 때문에 연합국에 가담한 일본의 패전을 대전제로 한 움직임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제1차세계대전에서의 독일의 승리를 바랐었다. 일본이 연합국에 가담하고 있었으므로 구축국인 독일이 승리하고 일본이 가담한 연합국이 패전하면 한국독립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되리라고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승장구하자 조선민족 사이에서는 독일이 승전하는 경우의 국제정세의 변동을 포착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다. 그것이 1917년 겨울에 임규를 통해 천도교와 선이 닿은 김시학이 발의한 독립운동안이었다. 이 안은 우선 천도교․기독교․유림의 3종단을 연합하고, 사회계에서 이상재․송진우․치민 등과 구관료계에서 윤용구․한규설․박영효․김윤식 등을 연합해 1만 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독일 수뇌에 제출하고 거족적 독립운동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 안은 여러 사람의 찬동을 얻었고, 손병희도 찬성하여 급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이 패전국으로 세계대전이 종결될 것을 전제로한 계획인데, 1918년에 들어와서 연합국의 승세가 전망되고 종전의 결과는 일본이 승전국이 되어 이 계획은 국제정세의 오판으로 인한 차질 대문에 중단되었다.

교단 핵심지도자들의 끈임 없는 직접적 독립운동방법론을 수용치 않던 의암에게 1918년은 새로운 전기가 안팎으로 이루어진 시기였다. 즉, 밖으로는 그 해 1월에 제1차 대전의 종전에 따른 윌슨 미대통령의 평화안 14개조의 발표였다. 따라서 식민지 국가의 입장에서는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국제연맹의 결성이라는 문제에 주목해 이때를 민족운동의 최적기로 판단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18년은 이미 해외로 망명한 독립지사들의 독립운동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1917년 상해의 신규식, 조소앙 등은 조선사회당을 만들어 스토홀름에 있는 만국사회당대회에 참가를 신청해 놓았고 1918년에는 만주의 독립지사들 중심으로 [대동단결선언]이 유포되었으며, 그 해 말에는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리고 적의 심장부였던 동경에서 벌어진 2․8독립선언은 의암의 결심을 확고하게 해주었다.

1919년 1월 상순 재일유학생들이 본국에 파견한 송계백이 서울에 도착하여 그의 선배인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을 찾아가서 일본 유학생들이 작성한 독립선언문 초안을 보였다. 현상윤은 흥분하여 역시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와 그의 친우인 최남선에게 보이고, 그의 은사인 보성학교 교장 최린에게 송계백을 데리고 가서 역시 독립선언문을 보였다. 최린도 역시 흥분을 누르지 못하였다. 현상윤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최린씨는 천도교가 움직인다 할지라도 천도교만으로는 힘이 약하니 널리 사회지명지사를 규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최남선씨를 내방하야 찬동을 구하였다. 그러나 최시 역시 최초에는 자중론을 주장하얐섰다. 그런데 그 시에 마츰 동경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에 독립선언을 하기로 하고 그 밀사로 송계백군이 동성으로 나와 나를 내견하고 모자내피속에 넣어가지고 온 선언서의 초본을 뵈여주었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최남선․송진우 양씨에게 輸示하였다. 그리한즉 이것을 본 최남선씨는 심기일전하야 운동에 참가할 것을 快諾하야T다. 나는 다시 이것을 가지고 최린씨에게 보인즉 최시는 다시 권․오 양시와 손병희씨에게 보였다.」

 

일본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라는 사실과 그들의 독립선언서를 본 사실은 그때까지 단지 논의단계에 있던 천도교와 중앙학교의 독립운동 논의를 급진전시켰다. 최린은 권동진․오세창 등에게 일본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그들의 독립선언 계획을 알린즉 이들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데 대하여 천도교주 손병희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1월 20일경 손병희를 찾아갔다. 천도교는 당시 잘 짜여진 강력한 중앙집권적 위계질서의 조직을 갖고 있었으므로 교주 손병희의 허락 여부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손병희는 3인의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는 제의에, 「형들에게 이미 여사한 기획이 있다면 나는 하등의 이의가 잇을 수 없다. 반드시 신명을 걸고 조국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응답하였다. 또한 손병희는 일본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계획에 대하여도 「젊은 학생들이 이가치 의거를 감행하려 하는 이때에 우리 선배들로서는 좌시할 수 없다」고 응답하였다.

손병희가 이와 같이 3․1운동 제의에 적극적으로 찬의를 표한 것은 그가 동학의 혁명적 전통으로 보아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압력을 밑으로부터 받고 있었고, 그 스스로도 오랫동안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1919년 1월 20일경)의 회합이 천도교의 본격적인 3․1운동 준비의 시작의 날이었다. 이 무렵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천도교는 그들이 일으킬 독립운동에 대하여 다음의 세가지 원칙을 합의하였다.

 

① 독립운동은 대중화하여야 할 것.

② 독립운동은 일원화하여야 할 것.

③ 독립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

 

이것은 3․1운동의 원칙을 천도교측에서 결정한 중대한 합의였다. 또한 이날 손병희는 이상의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오세창․최린․정광조 등에게 일임하였다. 천도교는 다시 권동진․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맡고 최린은 천도교와 외부와의 관계를 맡기로 합의했다.

 

Ⅳ. 3.1 정신과 종교연합의 함의

 

국내적으로도 해외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독립운동의 소식전달에 독립의 분위기가 고무되어 있었다. 우선 어느 정도의 조직력을 갖춘 종교조직의 연합이 이루어 졌다. 민족독립을 위한 이질적인 각 종교가 대화합을 이루어 하나의 공동목표에 접근키로 합의한 것이다. 특히 이제 천도교에서는 더 이상의 조직강화와 교단정비는 정치적 활동에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내외의 분위기가 성숙한 것이다.

우선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던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타종교와의 연합에 적극 나서고 민중운동의 원칙을 비폭력․대중화․일원화로 세워 마침내 3월 1일을 거사날짜로 결정, 거국 거족적인 만세독립운동을 일으키니 그것은 국내외 각지로 파급 확산되어 갔다. 결국 국민국가 실현과 완전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3․1민주혁명은 천도교의 민중운동 3대원칙에 따라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는바 그 선도적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22년에 폐막된 워싱턴의 태평양회의를 통해 3․1독립만세운동과 같은 거사를 천도교의 보성사팀이 중심이 되어 민중들의 합세와 지지․호소 하에 재차 제2의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봉기하려 기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3․1운동후의 여러 곳의 임시정부수립에 천도교인사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는 그들의 보국안민이념 실천의 연장선이었다.

이처럼 3․1독립운동은 1876년 개항 후 외세에 대한 일련의 민족저항운동, 즉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1896-98년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 1905년 이후의 국권수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 1910년 이후의 국내외 독립운동 등이 민중에 의하여 집약화된 전민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이었다.

물론 3․1독립운동은 거족적 독립운동으로서 어느 한 종파나 한 계층이 단독으로 추진한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각계각층의 성원이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거의 동시에 단결하여 궐기한 전민족적인 대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이렇게 파당을 초월한 대규모의 거족적 운동은 3․1독립운동을 제외하고는 그 이전에나 그 이후에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사회사적 관심의 첫째 대상은 어떻게 이 지난한 각계각층의 전민족적 동시궐기가 가능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독립」이라는 동일목표가 존재하였다는 사실만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3․1운동 이전이나 이후에도 이 동일목표는 언제나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3․1독립운동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그 「초기 조직화의 단계」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 세력집단의 흐름이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을 기획하면서 결국 「민족대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특히 주목하여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가운데 종교간의 연합이 그 중심을 이룬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무릇 종교란 가름침(敎)의 으뜸(宗)을 의미한다. 당시 우리 민족의 최고 현안은 독립의 쟁취였고 이민족의 압제를 벗어난 자주독립국가의 실현이었다. 이 절대절명의 민족적 과제에 교리와 교설이 판이한 종교간의 연합이 실천되어 거대한 민족운동의 사명을 완수했다는 점은 오늘까지도 많은 교훈을 주고있다.

특별히 3.1운동의 비폭력 무저항의 운동은 종교간의 연합을 이룬 성직자들이 앞장을 선 운동이었기에 가능했다. 서울을 기점으로 한 독립만세의 소리는 전국으로, 3월 말에는 만주, 시베리아, 미주 등 해외에서까지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선언케 했다. 2만여 회에 걸친 시위에 동원인원이 500만 명을 넘었다. 투옥된 조선인이 4만7천여 명에 이르렀다. 운동의 3대원칙 중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운동방식은 세계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비록 비폭력 무정항에 일제는 가장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 탄압하고 억압했지만 숭고한 우리 민족운동의 비폭력 정신을 꺽지 못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비폭력 무저항이 그렇게 큰 힘이었고 고귀했는지는 행하는 조선 민중들도 몰랐다. 오히려 우리를 탄압하던 일제로 하여금 스스로 야만인이라는 치욕을 갖게하고 말았다. 무저항은 만세운동을 잔인하게 압살하던 일제를 무력감에 빠져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비폭력이 가장 무서운 무기이고 용서가 가장 큰 복수임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훗날 우리의 3·1운동 소식을 접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동방의 등불 코리아, 그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고 찬탄했다. 그 빛은 간디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운동으로 이어졌다. 간디는 영국정부의 통치에 비협력, 불복종, 무저항함으로써 영국을 스스로 굴복하게 만들었고, 1763년부터 시작된 영국의 인도통치를 종식시켰다. 우리의 3·1운동이 없었다면 20세기의 성인 간디도 없었고, 인도의 자랑스런 독립도 불가능했다.

이렇게 위대한 3·1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가. 운동의 대중화는 곧 정책결정과 집행에의 국민참여일 것이다. 포퓰리즘에 빠져 대중없는 대중운동만 구상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민의 소리가 정부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작금은 민족대통합의 정신이란 말을 꺼내기도 부끄러울 정도이다. 시급한 사회통합은 3·1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비폭력 정신은 건조하게 황폐해진 우리의 마음에 여유를 줄 것이다. 또한 오늘 모든 운동에 무저항 보다 더한 무기는 없다. 3·1정신이 바로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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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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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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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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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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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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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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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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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