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을 감성적 체험으로
에스겔 36장 26~28절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녛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레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마태 복음 11장 2~6절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시켜서, 예수께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보게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한1서 1장 1~4절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자세히 살펴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 본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본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고 이 글을 써 보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성령강림'하면 여러분의 마음엔 어떤 영상이 떠오릅니까? 아마 무엇보다도 저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에 떨어진 성령체험에 관한 사도행전 기사내용이 떠오를 것입니다. 세찬 바람이 장풍처럼 불어닥치는 소리가 나고, 거룩한 불길이 갈라지면서 사람들 위에 임하며, 평소에 안하던 입술이 열리면서 방언을 쏟아내는 형상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오늘도 그렇게 임하시고 역사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체험을 꼭 그렇게 스테레오타입으로 고정시켜 놓고, 나는 그런 성령체험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성령콤플렉스에 시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기사는 그 때 그렇게 체험한 초대교회 신도들의 감성적 성령체험 이야기이니까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영의 종교입니다. 철학적 지성종교도 아니고 율법적 도덕종교도 아닙니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영적 진리체험이요, 성령의 임재 안에서 자유를 맛본 사람들과 하늘바람을 그들 가슴에 쏘인 사람들의, 혹은 하늘의 신령한 빛을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적 삶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뒤돌아 보면, 교회와 사회현실이 경직화 되고 생명력이 고갈될 때 언제나 영의 운 동안에서 사회와 교회의 지반이 흔들리고, 창조적 역동성이 일어나며,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여자들과 비천한 천민들도 예언을 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곤 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 하시는 시대는 언제나 그래서 카이로스입니다. 위기와 기회가 동시적으로 현존하는 매우 긴박감이 도는 "때"의 경험입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 하시는 현상학적 특징은 "진동"입니다. 모든 것이 진동하는 것입니다. 감옥의 터도 진동하고, 사람의 심령도 진동하고, 사람의 입술도 진동하고, 임금의 보좌도 진동하고, 안정하다던 은행의 예금계좌도 진동하고, 재벌의 탄탄하던 기업재무구조도 진동합니다.
마태복음서 오늘 본문기사는 예수님의 선교활동 초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시대 예언자로서 활동하다가 헤롯에게 미운 털 박히고 괘씸죄에 걸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달 가까이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그 제자들의 옥중면회를 통해 바깥세상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는데, 도무지 무슨 화끈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감옥에 들어오기 전 예수의 천국복음 활동 속에서 메시야가 그 분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지만 지금 생각하니 경솔한 판단인 것 같아 자꾸 의심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똑똑한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서 "우리가 목빠지게 기다리는 메시야가 당신이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 거요? 분명하게 딱부러지게 말해주시오"라고 물어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보고 들은 것, 곧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자가 듣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사건을 그대로 보고 들은 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총체적 사건입니다. 메시야는 이론으로 진리를 설명하고 자신의 메시야 됨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고 인지되는 생명적 사건을 통해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 유명한 요한1서 1장 1~4절 말씀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요한 1서의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글인데, 태초로부터 계신 이 말씀의 화육사건을 증언하는 글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 본 것이므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하니, 이 글을 읽는 그대들도 이 생명의 실재와 살아있는 사귐을 가져 영생의 생명을 맛보고 누리라는 편지입니다.
복음 곧 생명의 말씀은 지성적 해석학을 통해서 설명되거나 이해되기 전에, 몸의 언어로서 감성적 언어로서 체험되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성이란 인간의 생명체험 및 생명현실 중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일차적인 매개기관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감성적 체험에 대하여 매우 의심스런 눈으로 보아 왔습니다. 감성은 지성이나 덕성에 비하여 항상 폄하되어 왔습니다. 감성은 심리적 정서의 지배를 너무 쉽게 받아서 경박하고 오차와 실수가 많고, 정확성이 결여되기 때문에 학문세계에서는 더욱 경계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교회사를 뒤돌아보면,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집을 버티는 네 개의 기둥이 있음을 알게되는데 그 네 개의 기둥을 상징하는 인물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베드로, 바울, 요한, 야고보였습니다. 카톨릭교회는 베드로 기둥을 제일 중요하다고 보는 교회형태였습니다. 첫째기둥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신앙전통과 권위와 예전과 성직질서를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기둥인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가장 잘 해명하고 설명한 학자출신의 학승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13개의 서신을 우리에게 남겨 신약성서의 절반 가까이를 채웠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과 소명관계가 무엇인지, 의롭게 됨과 성화됨과 마침내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구원도리를 가장 심오하게 해설하고 설명하는 지성적 신앙의 대표상징 인물이었기 때문에, 루터의 종교개혁은 바울서신 로마서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셋째기둥이 되는 요한은 보다 신비적이고, 직관적이고, 성령론적입니다. "누구든지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말합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셔야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그리스도인 신도 그 3자가, 서로 서로 그 안에 거하는 신비적 연합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그 가지와 농부의 관계로서 해명하여, 그 상호관계성이 신비적으로 불가분리적임을 강조합니다. 다른 한편 마지막으로 넷째 기둥이 되는 야고보는 행함으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진정한 경건이란 말로서 하거나 이론으로 하거나 신령한 체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음으로써 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가 영의 눈을 크게 뜨고, 문명전환시기의 본질을 봐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시대경륜이 베드로 기둥과 바울기둥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시대에서 이동하여 이제는 요한 기둥과 야고보 기둥으로 옮겨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집기둥 둘이 뽑혀지면 집은 무너져 버리듯, 전통권위도 필요하고 교리 신학도 계속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요한적 기독교와 야고보적 영성을 가지라고 성령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쿠텐베르그의 문자시대 활자적 복음선교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요즘 새롭게 시작된 고도의 멀티미디어 시대의 선교자체가 오늘 요한 일서와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말씀의 증언을 감성적 체험으로, 총체적 사건연출의 방식으로, 몸이라는 구체적 육화형태로서 하라고 부르시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생명의 말씀을 교리와 신학의 설교로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공동체이기 전에,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와서 보고, 듣고, 만지고, 체험하도록 성령공동체로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처음 나오신 신도나 새교우가 교회공동체안에 들어와 앉기만 하면, 마치 전기자기장 안에 들어와 앉은 사람이 느끼듯이, 성령의 새로운 기운과 그 새로운 존재의 기운을 보고, 듣고, 만지고, 체험하는 감성적 증언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라는 이 생명공동체 안에서 분위기가 다르고, 공기가 다르고, 생명온도가 다르고, 은혜와 생명기운이 빛처럼, 전기흐름처럼 가득차 있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나아가 교회당을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쩐지 교회당 안에 들어가 보고 싶고, 저기에는 인간애와 사랑과 진리와 치유와 사귐과 정의와 생수가 있을 것같다고 직감적으로 느껴져서 끌려들어가는 느낌을 가지도록 교회가 영적 자기장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적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영적 몸이 되는 구체적인 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명시해야 할 것은 성령을 우리가 강요하거나, 우리가 돈으로 사서 부리거나, 심지어 우리의 정성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새로운 영을 불러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에서 기쁨의 등불로서 다가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와 사귀게 하여 우리의 생명이 기쁨과 만으로 건강해지도록 하는 생명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