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첫 연주지였던 워싱턴을 떠나 시카고로 향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장기간 해외연주 여행을 하면서, 타국에서 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우리는 시간엄수를 최우선 순위에 놓고 움직였다. 단원들 모두가 한 집에서 생활했는데, 단장인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들이라 외출을 한 번 하려해도 준비하는데 적지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엄수하며 연주회 준비, 신문사와 방송사 등에 홍보 등의 바쁜 일정들을 소화했고, 나는 우리가 점차 십자가 군병의 모습을 더욱 갖춰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과 음악
시카고에서 연주 일정이 없는 날 관광을 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오대호다. 우리는 호숫가에 도착하자마자 와~ 하는 탄성을 질렀다. 이 미시건 호수는 호수라고 부르기엔 그 크기가 감당이 안되었다.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야말로 망망대해였다. 호수 가운데에는 커다란 배가 떠다니고, 호수의 가장자리에는 아름다운 백사장이 펼쳐져있고, 그 끝에는 시카고의 건물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멋진 풍광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뒤 계속 느낀 것이지만 대부분의 하늘의 맑고 공기가 깨끗했다. 그리고 이 곳 호숫가에서는 자연의 절정을 느낀 듯 했다. 음악인인 우리가 환경, 그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환경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환경을 주제로 하는 음악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시건 호수 앞에서의 필그림앙상블 |
나에겐 먼나라 이야기, 그들에겐…
하나님께서 지경을 넓혀 주신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도 그것이 나에게 경험적으로 체득되진 않았다. 그런데 미국연주를 하며 실제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누군가가 대표기도를 하면서 '지금 우주에서 기체고장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우주선과 선원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뜻밖의 내용이 깜짝놀랐다. 이제까지 나는 이런 기도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우주선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는데 내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인식할 수 있는 현실이었다.
이런 체험을 통해 나의 지경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떠한 계획을 하고 계실지 궁금해졌다. 하나님의 계획을 확실하게 알 수 있으려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끝까지 따라 가는 것이 맞겠다 싶어 나는 마음의 다짐을 새기며 계속 이어지는 연주를 준비해갔다.
박수갈채 속에서의 단상
미국에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뉴욕의 911 테러 이후 보안검색이 강화되어 절차가 매우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시카고에서의 연주를 끝내고 뉴욕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가 이륙을 하려다 말았다. 우리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각자 싸온 식사(국내선에는 기내식이 제공되지 않으므로)를 꺼내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비행기가 다시 활주로에 들어섰다. 그리고 힘차게 떠야되는데 이번에도 한참을 있다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후에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기체 어딘가에 고장이 있어 그것을 손보고 출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3시간을 비행기안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앉아있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리고 세번 째, 비행기가 다시 이륙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진짜로 뜨려나 했는데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런데 기내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 이륙이 3시간이나 연장된 것이 과연 박수받을 일인가? 나는 왜 저 사람들과 달리 짜증이 날까.
나는 우리 필그림앙상블이 연주 전에 문제가 생겨 시간을 넘기고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면 관객들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려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내가 관객 입장이라면 어떨까 라고 생각하자 속이 뜨끔했다. 관객들이 너그럽게 기다리며 용서해 주면 좋겠지만 내가 관객이라면 가만 있지 못할 것 같았다. 워싱턴에서의 첫 연주에서 우리가 연주 도중 음향에 문제가 생겼을 때 많은 분들이 참고 봐주셨던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그럼 나도 이런 상화에서는 같이 박수를 보내야 하는 데 쉽사리 마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나는 아직 옹졸한 구석이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