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사람이 죽으면서 자동적으로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영혼은 허공에 떠돌아다니거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어 왔다. 소크라테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 심지어 계몽주의 독일 철학자 칸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기독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역시 부활을 영혼불멸 사상과 연결시켜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부활이란 것은 예수의 부활을 포함해서 죽은 자는 자동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다는 정도로 알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이 한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 땅에 묻히거나 한줌의 재로 바람에 흩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못지않게 똑똑한 의식을 가지고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생각과 믿음은 부활신앙과 함께 절실하고 필요하다. 이러한 부활사상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아파하고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리고 악한 사람의 악행을 보면서, 그런 인간은 이 세상의 법정에서도 죗값을 치러야 하지만, 저세상에서도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인간들의 보편적 정의감에서도 영혼은 불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선한 사람이 되라고 교육하고 선한 사람을 칭찬하는 이유 역시 저 세상에서의 상,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무릎에 앉아서 천사들과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상을 받게 된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사상을 위해서도 부활과 영혼불멸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말 부활도 영혼불멸도 없고 천당과 지옥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옳고 바르게 정직하고 착하게 살아야 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교훈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부활은 십자가의 고난의 극복이라고 생각하고 고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부활이라는 희망이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만 하면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고 부활하게 된다고 교회 목사들은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자동적인 고난의 극복이나, 영혼불멸의 자동적인 사건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한 개인의 영혼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집단적인 것이고 정치적인 사건이며 혁명이다. "부활"이란 말은 신약성경에서 쓰인 그리스어로 "일어난다"는 뜻이 있다. 이 때 일어난다는 말은 자다가 일어난다거나 죽은 사람이 숨을 다시 쉬고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난다는 뜻만이 아니다. 부활의 정치적인 뜻은 억압하는 세력과 권력에 저항하고 싸우기 위해서 봉기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압제와 착취와 살인으로 부패한 죽음의 세력에 저항해서 유대 민중과 함께 일어나 봉기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의 권력에 대항하는 봉기였던 것이다. 예수와 함께한 민중의 봉기이며 승리가 바로 예수의 부활이며 민중의 부활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부활절의 깊은 뜻, 간절한 희망은 무엇인가? 악하고 부패한 정치권력이 심판 받는 권선징악의 부활을 의미하는가? 나아가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국민과 민중을 감시하고 탄압하고 무시하고 국난과 저항, 그리고 부활의 한국사를 왜곡시키고 아이들이 세월호와 함께 진도 앞바다의 물고기 밥이 되도록 내버려 둔 채 희생자와 유가족을 몰염치한 "시체 장사꾼"으로 몰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진정한 사과로 위로하거나 배상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욕보이는 약속을 침략국과 합의하는 정권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봉기하는 것이 참된 부활을 전파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십자가의 죽음의 세력에 맞서 일어나는 정치적 부활은 4월13일 민주주의 선거에서 결판이 날 것이다. 다시 또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인가? 아니면 부활해서 떳떳이 일어나 고개를 들고 민주주의 국민의 당당한 모습을 온 세계에 드러내 보여줄 것인가?
할렐루야 주 다시 살아 나셨네!!! 부활의 찬송소리가 온 천하에 울러 퍼지는 4월을 내다본다. "잔인한 4월"이 아니라 "라일락 꽃 향기"와 함께 민주주의가 승리한 4.19의 한국의 4월을 희망하고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