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11일(월)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기독교세월호원탁회의 주최로 ‘세월호 2주기 기독인 집중행동의 날' 행사가 열렸다. 이날 설교는 좁은길교회 박철 목사가 맡았다. 박 목사는 ‘기억'과 ‘공감'을 화두로 꺼내 들었다. 박 목사의 설교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주]
세월호 참사 2주기를 기념하여 고귀한 304인의 생명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광화문 광장 이 자리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400년 넘게 종살이를 탈출한 후 광야 40년 방황 끝에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살아야할지 당부하면 강조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중에 특별히 강조된 단어가 ‘자카르'(zakar)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기억하란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 40년 동안의 생활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고통가운데서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최근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쓴 <유신>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방대한 자료를 첨부하여 유신정권의 허구성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왜 그는 이런 힘든 작업을 했을까요? 과거 유신정권의 폭력성과 허구성을 독자들로 하여금 똑똑히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는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Yad Vashem; יד ושם)이 있습니다. 야드 바셈은 "나의 집, 나의 울 안에 그들의 송덕비를 세워주리라. 어떤 아들 딸이 그보다 나은 이름을 남기랴! 나 그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주리라."(사 56:5)라는 성경 구절에서 왔다고 합니다. 야드(יד)는 ‘기억, 기념'이란 뜻이고 바셈(שם)은 ‘이름'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이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 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입니다.
기념관 입구에는 히브리어로 "망각은 포로의 상태를 이어지게 하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라는 문구가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기념관에는 유대인이었기에 죽어야만 했던 150만 명의 어린이들을 위한 기념관도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어린이들의 희생을 상징하는 촛불들이 천정에서 바닥까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추모관에 들어서면 그때 희생당한 150만 명의 어린이 이름이 한 사람씩 스피커를 통해 호명되고 있습니다.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유대인 역사의 최대의 비극을 잊지 않고,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자신들의 과거의 고통, 고난의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미래의 역사를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으면서 2014년 4월 16일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언제인가 세월호 유족과 만나서 대화하는 중에 가장 두려운 일은 세월호 참사가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질까봐 그것이 가장 두렵다고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2년전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목격하면서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 휴대폰에 오후 4:16분에 알람을 진동음으로 맞춰놓았습니다. 제 자신에게 4.16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2014년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똑똑히 기억하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2014년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분명하게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과거의 역사를 똑똑히 기억하는 한, 비록 잠시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절망이 우리를 뒤덮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인간다운 세상을 회복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이 참사의 전모를 머리에 저장하고, 몸에 각인시키고, 다양한 매체로 기록을 남기는 것을 통해서, 역사의 증인이 됨과 동시에 새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고통에 함께 괴로워하는 사람
두 번째 우리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으면서 우리의 공감능력을 확대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사람입니다. 가족만 아니라 그 너머 사람들에 대해 공명하는 사람입니다. 눌린 사람, 내몰린 사람,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고통에 함께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그 대상이 짐승이든 식물이든, 이 땅 모든 생명의 신음을 듣고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짓밟히고 내쫓기고 약탈당하고 죽어가는 생명의 고통을 마음으로 공감하고 몸으로 공명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약탈과 죽임은 그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의 슬픔이요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끝내는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에 동감하고 공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가 그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 파묻히지 마시고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픔을 당한 유족들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제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집이었습니다. 그의 설교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이야기를 읽고 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강도만난 사람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두 사람과 사마리아인의 질문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매우 으슥하고 험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강도가 출현할 만큼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내가 저 사람을 돕느라 시간을 지체했다간 나도 강도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을 못 본척 하고 줄행랑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의 질문을 달랐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친다면, 내가 저 사람을 돕지 않으면, 저 사람은 죽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사마리아인이 가졌던 질문과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장(斷腸)이란 말을 아시는지요? 말 그대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당시 민중들을 대할 때 "불쌍히 여겼다, 측은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히브리어 뿌리를 찾아가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ζομαι)로, 예수님께서 당시 민중들을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마음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 밑에 신음하던 당시 민중들, 80%가 노예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단장의 심정으로 대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이런 예수의 영성 없이 ‘영성 영성'한다는 것은 결국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30년 전 제가 강원도 정선 덕송교회에서 첫 목회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교회 근처에 남형(초3년), 남억(초1년)이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교회사택으로 달려와서 놀다가 어느 때는 저녁밥까지 먹고 가곤했습니다. 얼마나 정이 들었는지 저희 부부에게 친 자식같이 느껴졌습니다. 1988년 1월1일 설날 아침, 남형이 남억이가 동네 앞 강(조양강)에 썰매를 타러 갔다가 그만 얼음이 깨져 물속에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먼저 동생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형이 구하러 들어갔다가 둘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나룻배를 강물에 띄어놓고 찬물에 꽁꽁 언 두 아이를 건져다 따뜻한 아랫목에 뉘었습니다.
남형 남억이 부모님은 실성하다시피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을 햇병아리 전도사가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사망신고를 하고 다음날 아침, 동네 청년과 지개에 나누어지고 동네 뒷산에 묻으러 올라갔습니다. 지개를 지고 가는데 전혀 무게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습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졌습니다. 두 아이를 나란히 땅에 묻고 봉분 앞에 나무십자가를 세웠습니다. 무덤 앞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저는 그때 단장(斷腸),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예리한 칼로 제 살갗을 도려내는 아픔이 밀려왔습니다. 아내는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근 1년 동안 아무 말도 안하고 지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호 참사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는 2년 전 텔레비전을 통해서 3시간동안 생중계되는 동안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때 부모님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창자가 동강동강 끊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단장,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예수님의 마음, 세월호 유족들의 마음이 없다면 세월호참사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훈수나 참견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고통과 슬픔에 깊이 공명했습니다. 그 예수의 공명의 끝은 십자가였습니다. 그 예수의 사랑의 끝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공명의 끝이고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슬픈 사월이 돌아왔습니다. 지금 산에 들에는 각종 봄꽃들이 활짝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사한 꽃을 보고도 우리의 마음이 공허하고 우울하기만 합니다. 닿을 수 없는, 품을 수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사월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나라를 만들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는데,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은 너무나 커진 상황인데 2차 청문회까지 했지만 책임 소재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릴 때입니다. 불의가 정의를 비웃고, 권력이 약자를 조롱하고, 억울함이 여전히 신원되지 않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정의가 불의를 이기고 약자가 권력에 정당하게 소리를 내며, 억울한 부모의 기도가 하나님께 전달돼 진실이 드러나는 소망이 가득 찬 세월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욱 민감하게 하늘을 향해 귀를 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함께 굳게 손을 잡고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각별하신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