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포괄주의(8) 라너: '익명의 그리스도교'
라너는 은총에 대해 우선 익명성에 주목함으로써 그 보편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너는 자신이 속한 종교전통에 잇대어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에의 소속을 통한 입증'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매우 임의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입증'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으로 새겨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가시적인 그리스도교,' 즉, 익명성을 넘어서 '그리스도교'라는 특정 종교의 이름이 이제 본질을 직접 가리키고 드러내지는 못할지라도 본질실현을 입증하는 차원에서는 뜻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체적 책임이라는 본질을 현상적 차원에서 드러내는 기능이나 위상에서 특정종교의 이름이 그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종교의 이름을 초역사적 본질로 옹립하는 몰역사적 착각에 더 이상 매몰되거나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일침이 담겨 있습니다. 둘째로 주목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적 차원에서의 입증이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그만한 단계와 위상이 구별될 수밖에 없고 그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상적인 입증이라는 이유로 모든 현상들이 마구 정당화되거나 같은 위상으로 평가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현상도 그만한 단계가 있으며 이름도 이런 점에서는 구별의 기능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라는 특정종교를 가리키는 이름이 여기서 비로소 그 위치를 잡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라너는 어떻게 현상적 입증의 차원에서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의 위상을 정립할까요? 이것이 우리가 그의 주장을 읽어가는 초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주체적인 책임 실현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에로의 소속이 중요하다는 것이 라너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처한 익명의 상태를 벗어나 그것이 드러나게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너는 '선교'라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의 선교수행이라는 과제가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의무이긴 하지만 익명성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 됩니다. 왜냐하면 익명성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미 주체적인 책임을 공유하는 한에서 다른 종교인들도 그리스도교적인 본질을 부분적이나마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면 굳이 선교가 필요하겠는가라는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러한 충돌의 문제, 즉, 보편적으로 전제되는 익명성과 선교수행의 필요성 사이에 벌어질 수밖에 없는 긴장의 문제가 라너의 논의의 핵심이고 절정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핵심적 논의를 통해서 라너는 익명성 주장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요?
그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은 믿음의 은총으로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라너, 116). 매우 강력한 선언입니다.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이 좋아하고 즐겨 쓰기도 하는 말입니다. 은총이 이미 전제되어야만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익명성은 모르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은총을 받은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으니 기존의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환영받는 발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발언은 도대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요? 이런 경우의 사람들을 고려하면, 은총의 선행이나 익명성에 대해서 의구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이 선교수행의 의미를 일구어낼 수 있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 라너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아니 선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도 은총의 선행적 차원은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두 구절을 잇대어 읽어 가면 이 점이 보다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할 때는 선교의 설교란 (최소한 타율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의) 믿음의 은총을 전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 복음의 설교가 듣는 자들에게 떨어지는 순간에 믿음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적적이며 거의 신화적인 관념이다. (라너, 116, 117)
앞 문장은 익명성의 내용인 은총의 선행이 신앙의 전제라는 것을 가리키고, 뒤 문장은 이와 조응하여 선행은총이라는 전제가 없이는 믿음은 기적이나 신화가 가리키는 것처럼 마술적일 수밖에 없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익명적 선행은총은 우리의 믿음을 마술 또는 주술로부터 구해주는 비신화화의 기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형상대로 만드시고 입김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이름이 아직 붙지 않아도, 아니 몰라도, 이미 형상이고 입김입니다. 이를 '선행은총'이라 했고, 그 이름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에 대해서 '익명'이라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잠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은 믿음에 대해 오히려 기적적이고 신화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느님의 은총과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살다가 복음을 듣는 순간 하느님의 은총이 갑자기 역사하기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개신교회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는 이제 1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가톨릭교회가 들어온 것은 이보다 한 세기 정도 앞설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따금씩 나오는 질문인데, 그렇다면 그 전에 이 땅에 살다가 가신 조상님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그들은 의도적으로 교회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고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ㅇ'자도 들어보지 못한 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모두 지옥에 갔나요? 이런 질문은 약간의 비아냥을 담아 교회 밖 사람들도 간혹 던지곤 합니다. 조상들은 다 지옥 보내고 혼자 천국가면 기분 좋으냐면서 말입니다. 라너는 바로 이러한 문제를 포함하여 다루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손과 발, 선교사의 등에 업혀서 오락가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마치 자신이 구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곤 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뒤에는 라너의 제안을 받아들여 커다란 전환을 이루어내긴 했지만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종교 다원주의'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감리교 신학대학 학장을 지냈던 고 변선환 교수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발언을 해 종교재판을 받아 목사자격을 박탈당하고, 출교처분까지 받았습니다. 저 말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에 대항해서 나온 표현입니다. 변선환 교수에 대한 한국 개신교 사회의 냉대는 저러한 주장을 고수하는 이들이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이는 소위 이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주장이나 또는 이에 대한 대항으로 등장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주장 모두 비판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왜일까요? 구원과 교회는 같은 선상에서 다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교회를 한 묶음 안에 넣고 교회가 구원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다루는 것 자체가 착각입니다. 구원은 교회를 넘어섭니다. 구원은 은총이며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를 교회가 착각하는 순간 교회는 타락합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은 예수께서 단호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이 대목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배타주의와 포괄주의의 주어가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앞서도 말했지만, 배타주의, 복음주의의 주어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포괄주의자들의 주어는 '그리스도교' 또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모두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구원의 주어를 저 말들이 충분히 살리고 있는지요? 구원의 주어는 '하느님' 아닌가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노심초사 구원에 관심하지만 실상 구원의 주어가 누구인지,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성찰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입니다.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인데 왜 제쳐두려 하는가 하고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주체는 마땅히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신다는 것이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의 고백입니다. '로부터(from)'와 '통하여(through)'는 불가분리이기는 하지만 구별됩니다.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또 이를 따지려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삼위일체야말로 본체가 하나이지만 기능이나 위격은 구별된다고 하는 것이니 역공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교리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은총으로서의 구원으로 돌아갑니다. 구원은 은총인데 은총은 무조건적이고 선행적입니다. 그런데 반복하지만 이 '무조건'이라는 말이 인간에게는 잡히지 않습니다. '무조건'이라는 표현은 개념어가 아니라 상징어, 즉,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이라는 말이 있으니, 언어의 마력에 의해 우리는 마치 '무조건'이 잡힐 수 있는 개념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무조건은 조건의 반대말이므로 조건을 없애면 '무조건'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조건'을 없앨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우리의 생활 방식, 삶의 양태가 이미 철저히 조건의 영역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부모의 사랑을 '무조건적'이라 합니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조차 '자신의 자식'이라는 조건에 매입니다. 남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무조건적'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러한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은총은 알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는 온갖 말과 행동에 '은혜'와 '은총'을 붙여 은총을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다루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하느님의 은총이 지닌 선행성과 무조건성을 우리 인간은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극히 일부를 맛보고 경험할 뿐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과 은총에 붙이는 또 다른 표현인 '절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절대'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절대'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다만 '상대'에 대한 반대말로 새길 뿐입니다. 지금 와서는 퍽 자연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상사에서 이러한 통찰을 공유한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칸트입니다.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은 『신학방법론』에서 신학을 1차, 2차, 3차로 나누는데 여전히 대다수 신학적 흐름이 칸트의 성찰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못한 채 1차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합니다. '절대'라는 근거 위에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을 전개하는 고전적인 교의학 방식을 택하는 흐름은 모두 1차 신학입니다. 이러한 신학은 초역사적이며 '무엇' 물음 하나만 가지고 신학을 전개해 나갑니다. 과학 혁명 이후, 칸트 전후로 인식 주체로서 '누가'가 등장하고 '누가'와 '무엇'과의 관계에 대한 '어떻게'가 등장해 신학에서도 이를 점차적으로 수용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수용한 신학을 카우프만은 2차 신학이라 합니다. 3차 신학은 여기서 더 나아가 '왜'라는 물음 아래 신학을 전개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3차 신학은 고사하고 2차 신학의 전환 역시 수용이 안되는 게 대다수 그리스도교 신학의 현재입니다.)
이제 은총이 지닌 이러한 선행과 무조건에 주목한다면 라너가 제안한 '익명'이라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표현을 애써 사용한 의도를 좀 더 적절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익명'의 소극성은 바로 '은총'의 적극성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리스도교에 매이지 않으며 불교도,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비종교인, 아니 모든 피조물을 향합니다. 라너는 이 은총의 기초 위에 선교를 놓습니다. 앞서서 트뢸취는 선교가 불완전한 타당성을 완성된 타당성으로 올리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라너는 좀 더 우아한 방식으로, 나름대로 그리스도교 전통의 연속성 속에서 이러한 논의를 펼쳐나갑니다. 그에 따르면 불교도,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이름을 모른 채 자신을 불교도, 이슬람교도 인줄로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들에게 온전한 이름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름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물론 달랑 이름만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