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위원회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4월17일(일)을 2주기 추모주일로 지킬 것을 권면하고 공동설교문을 마련했다. 한편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주임사제 주성식 신부)은 주보에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명단을 싣고 희생자를 추모했다.
아래는 설교문 전문.
예수께서 비통한 심정으로 한 무덤 앞에 섰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라는 사람의 무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 무덤에 오기 이전부터 눈물을 흘리시고 비통해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 예수께서 라자로를 무척 사랑하셨나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가 잠들어 있으니 깨우겠다고 하셨으면서도 그 죽음 앞에서는 매우 비통해 하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실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 그냥 무덤 문을 열고 라자로를 일으키시면 될 것을 그 앞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서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의 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이며 공감입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라고 의심하고 시험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께서는 그저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단지 기적만을 바라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형제의 죽음 앞에서 통곡을 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지 예수에게서 기적만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이, 그리고 죽은 이로 말미암아 애통하는 사람들과 한 입장이 되고 그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고 사랑입니다. 기적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다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서 있는 예수님처럼 죽음 앞에서 몸서리 처지는 애통함을 느낍니다. 재작년 2014년 4월 16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참사를 겪었습니다. 476명의 승객을 태운 세월호가 진도 앞 바다에서 침몰해 가는 과정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보았습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304명이 수장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어야 했던 안타까움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슬퍼해야 하는 까닭은 단순히 어린 학생들이 죽어서만도 아닙니다. 304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죽어서도 아닙니다.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불의의 자연재해나 사고로 인해 이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경우는 많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고 함께 슬퍼해야 하는 까닭은 이 사건이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말할 수 없는 우리 사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뿌리 깊은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병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기주의와 맘몬 숭배에 치우쳐 있는가, 악이 오히려 평범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영혼과 양심이 타락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에 교회와 신앙인들은 깊은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침몰하는 배에서 물이 차오르는 가운데 구조를 간절하게 바랬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거절당한 그 손길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가만히 기다리라고 했던 어른의 말을 믿었던 것을 후회했을까요? 당연히 구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을까요? 깊은 배반감에 빠지지 않았을까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침몰 그리고 구조의 실패를 두고 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해서 목숨을 건 단식도 했고, 특별법도 만들고, 특별조사위원회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진실은 하나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유족들, 그리고 실종자 가족들은 아직도 2014년 4월 16일에 멈춰 서 있고 여전히 애통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쓰고 난 노후 된 배가 다시 우리의 여객선이 되고 무리하게 짐을 싣고 사람을 태우는 모든 과정이 극단적인 배금주의와 관료들의 부패의 소산이었습니다. 또한 자질이 부족한 선원들이 수 백 명의 목숨과 소중한 재산들을 싣고 운항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관계기관의 부패와 무능은 국민 모두를 절망케 했습니다. 배가 기울고 침몰하는 상황이 전 국민에게 보여 지는 상황에서도 고기잡이 어선들의 구조 활동과 자원하는 잠수사의 구조 활동도 해경에서 계약한 회사의 구조를 기다리기 위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자발적으로 배에서 나온 사람들 말고는 한 사람도 국가에 의해 구조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기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절망하고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습니다. 혹시 국가가 국민을 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중에 아직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단원고 학생의 아버지는 봄이 오는 것이 무섭다고 합니다. 피어나는 꽃들을 쳐다보기도 싫다고 합니다.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세월호에 탔다가 탈출한 사람들은 아직도 죄책감에 빠져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승객을 구조하던 사람은 극심한 가난과 병 그리고 학생이 내미는 손을 잡아주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가족들은 한이 맺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한은 온 국민의 한이고, 양심 있는 사람들의 한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신앙인의 한입니다. 우리는 그 한을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한은 보상금으로 절대 풀리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을 감옥에 구속하고 처벌한다고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나 보복으로 풀릴 수 있는 한이 아닙니다. 정권이 바뀐다고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 한은 우리 사회공동체가 거듭나고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이 역사에서 부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인간의 생명과 인격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될 때, 억울한 죽음 앞에 부끄러운 마음을 회복할 때 풀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야만적인 이기심과 물신숭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 희망의 꽃이 피게 되고 과거의 상처는 교훈과 역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을 열게 했습니다. 이미 죽은 이의 몸에서는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무덤을 열게 하고 ‘라자로야, 나오너라.'하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그리고 라자로는 걸어서 나왔고 예수께서는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제발 세월호 이야기를 그만 좀 하자고 말합니다. 이미 죽어버린 것, 지나간 일을 지금 어쩌란 말이냐, 제발 시끄럽게 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월호 선장은 방송으로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미 배가 기울어서 공포에 떨고 있는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자신은 먼저 빠져나왔습니다. 우리 사회 공동체 속에서 한 맺힌 사람들이 울부짖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피해 받지 않은 사람들만 빠져나오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공감도 없고 이웃 사랑도 없습니다. 야만성의 민낯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죽은 사람의 무덤 앞에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예수님 혼자서 빠져나가겠다고 적당히 애도하고 뒤돌아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덤 문을 여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포기하고 절망하고 이제 시간이 지나가면 잊어버릴 사람을 다시 나오게 합니다.
무덤은 과거의 흔적입니다. 희망이 갇혀져 있는 곳입니다. 기억이 갇혀져 있는 곳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무덤은 망각입니다. 잊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절규하는 한을 망각이라는 무덤 속에 가두려고 하는 모든 시도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은 마음이 불안하고 아프기에 거룩한 창녀 쏘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쏘냐는 바로 이 라자로의 부활의 대목을 읽어줍니다. 라스꼴레니고프로 하여금 죄라고 하는 무덤에서 빠져나오라고 하는 암시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월호라고 하는 한의 무덤, 망각의 무덤에서 우리 자신을 나오게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칭칭 감아놓은 비정함과 개인주의를 풀어야 합니다. 공동체 의식과 형제애로 우리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억에서 출발합니다. ‘망각은 우리를 노예 상태로 이끌어 가고, 기억은 구원의 통로이며 신비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합니다. 2000년 전의 사건을 우리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예수께서 나누어 주시는 빵과 잔을 받으며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출애굽을 기억하고 하느님께서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기억합니다.
조지 오웰의 ‘1984'라는 소설 속에서 오세아니아라는 나라는 빅 브라더의 철저한 통제를 받는 전체주의 사회입니다. ‘텔레스코프'라는 지금의 무인 카메라 같은 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표정하나 손짓하나 모든 것을 감시하고 조금만 이상이 있으면 무서운 탄압을 내립니다. 사람들은 이 텔레스코프의 감시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빅 브라더는 그의 의도대로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서 역사를 왜곡합니다. 불리한 역사 또는 기록은 철저히 지워버립니다. 사람도 사건도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역사를 기록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합니다. 그러면 그 거짓말은 역사가 되고 진실로 둔갑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이것이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당의 슬로건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역사를 지우고 망각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세월호의 영혼들이 역사에서 부활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오듯이 우리 영혼이 망각의 무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죄와 야만성의 무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기심과 물질만능주의의 무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머리로 하는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기억하는 것은 오래오래 기억합니다. 우리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그리고 그 가족들을 가슴으로 그리고 공감과 연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짧은 언어로 가족들의 마음을 풀어줄 수 없습니다. 또 우리 손으로 엄청난 문제를 다 해결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손을 잡아 줄 수 있습니다. 참사를 당하는 것까지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은 신앙인의 책무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부활의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들로서 우리는 진실이 가려지고 왜곡되고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아무개야 나오너라!
14살 소녀가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일본군의 성노예를 해야만 했던 정신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귀향'에서는 해원을 마지막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 분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우리 마음속에서 부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란 나비들이 고향으로 찾아와 가족들을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디 304명의 원혼들의 한이 우리의 기억으로 역사적인 부활로서 풀려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여, 어린 양들을 보살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