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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애의 은사?

2016년 04월 17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채수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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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

성경본문

사도행전 9:32-43

베드로는 사방을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내려가서, 거기에 사는 성도들도 방문하였다. 거기서 그는 팔 년 동안이나 중풍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났다. 베드로가 그에게 "애니아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서, 자리를 정돈하시오" 하고 말하니, 그는 곧 일어났다. 룻다와 샤론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를 보고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런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 무렵에 이 여자가 병이 들어서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겨서 다락방에 두었다. 룻다는 욥바에서 가까운 곳이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로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일어나서, 심부름꾼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그 곳에 이르니,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묵었다.

요한계시록 7:13-17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10:22-30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 되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설교문

1. 199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1935-)에게는 발달장애와 자폐증에 걸린 아들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라는 의사들의 조언을 거부하고 수술을 했지만 아들은 시각을 잃고, 말도 잘하지 못하고 신체적으로도 발달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에는 아들에게 빛을 의미하는 히카리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에 히카리(1963-)가 모든 관계가 단절된 자기만의 세계 속에 칩거하며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절망한 그는 한 때 글 쓰는 일을 포기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고통과 좌절 속에서 매일 술로 지내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새 소리에 히카리가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가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자기 밖의 어느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아들이 노래하는 새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표징이었습니다. 자폐증 환자와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던 그의 선입관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자폐 장애인은 비자폐 장애인보다 열등한 인식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온 그의 편견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대화를 나누려면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누구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오에 겐자브로는 히카리에게 피아노 선생 쿠미코 타무라를 소개했고, 히카리는 말하는 대신에 음악과 작곡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시를 쓰고 노랫말을 짓고 아름다운 곡을 만든 히카리의 첫 음반은 백 만장 이상 팔리는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니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보다 더 끈질긴 의지와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어, 인간극장을 감동으로 채우는, 비장애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애인이 히카리 같을 수도,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1)같은 인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과연 이런 감동적인 장애인들 이야기가 우리 주변의 평범하고, 소외당하고, 차별받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장애인들에게도 감동과 도전을 줄까요?

명성이 정점에 달했던 2008년 루게릭 병 진단을 받고 2010년에 사망한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주트(Tony Judt, 1948-201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종의 운동신경세포 장애인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의 변종, 곧 루게릭 병을 앓고 있다. 나의 육신은 한 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이었다. 사실상 루게릭병은 가석방 없이 진행되는 감금이다. 신체적 결함에 비해 비신체적 보상을 찾으라고 격려하는 것은 아무리 선의라 해도 부질없다. 쓸데없는 짓이다. 상실은 상실일 뿐, 아무리 좋은 이름으로 부른다 한들 마찬가지다.'

장애는 은사가 아닙니다. 장애는 단지 불편한 것만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거나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장애는 단지 장애일 뿐입니다.

그런데 장애가 은사라니요! 이런 말은 자칫 장애인을 우롱하거나 더 깊은 상처를 주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장애가 은사란 말일까요? 아니 어떻게 장애가 은사가 될 수 있단 말일까요?

2. 오늘의 말씀은 베드로가 룻다 지방에서 8년 동안 중풍 병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를 고쳐주고, 이어서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라는 여성 제자를 살려낸 이야기입니다. 치유 받은 남자와 여자를 같이 언급함으로써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는 은사에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떠한 차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차이와 차별의 극복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주목할 만한 정신이었습니다. 다비다라는 여성을 살려낸 후, 베드로가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물렀다는 기사도 이런 정신의 반영입니다. 무두장이는 죽은 짐승의 가죽을 다루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유대 법에 의해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 당했고, 이들과의 접촉 자체도 부정한 것으로 여겨져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꺼리는 사람이었지만, 베드로는 이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 어떤 병도, 그 어떤 종류의 직업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차별과 불평등의 이유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한 것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과제를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옥중에서 세례자 요한이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2-5).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질병과 장애를 당사자나 부모의 죄의 결과로 이해하고, 그런 이유로 병자와 장애인을 소외시키고 차별하는 유대 사회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치유 받은 사람들을 대제사장에게 보내 그들의 건강해진 몸을 보여주고 사회로 귀환하게 함으로써 질병 때문에 주어진 종교적 편견과 사회적 차별과 소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치유는 상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임을 분명히 하셨고, 자신을 초능력자로 여겨 추종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대중을 피하시기도 했습니다.

3. 오늘 계몽된 과학시대에 질병이나 장애를 종교적으로, 다시 말해 죄의 결과로 받아들이거나, 제도적 소외와 차별의 근거로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병과 장애가 소외와 보이지 않는 차별의 장벽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어떤 사람에게 결여되어 있거나 장애를 갖고 있는 부분만 보고 그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결여된 것이 없을까요?건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일까요?

장애와 비장애는 우리가 만든 기준일 뿐입니다. 쓸모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포기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참 인간성만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성의 모든 불행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삶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용납 받았을 때, 그의 장애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카리스마가 될 때, 그의 장애는 오히려 은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광채가 장애인의 삶 위에 비출 때, 그 사람의 삶은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장애인 안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 자신은 물론, 비장애인도 장애인입니다.

장애가 은사가 될 수 있을까요? 비장애인도 갖기 어려운, 비장애인의 능력을 뛰어넘는 잠재력을 보여줄 때일까요? 세상에서 인간 승리의 감동적인 기록을 남긴 장애인들만 은사받은 장애인일까요? 아닙니다!

장애가 은사인 이유, 그것은 장애인이 비장애인들보다 더 뛰어난 삶을 살고 보여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장애가 은사인 이유, 하나님께서 주시는 카리스마인 이유, 그것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가난하고 병들고 장애를 가진 이들과 동일시(마태 25장)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시는 일들을 장애인에게서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9,3). 하나님께서는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27). 하나님께서 장애인을 배타적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애인들을 치유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미리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의 인식론적 특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애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이 없는 공동체, 장애인이 숨어살아야 하는 공동체야말로 장애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있는 장애인들의 얼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광채를 볼 수 있을 때, 장애는 장애인에게나 비장애인 모두에게 은사가 됩니다.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사람들의 얼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를 볼 수 있을 때,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갈 것입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시혜가 아닙니다. 평등한 관계에서 인간으로 존중받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자비를 표현하는 히브리어 '라하밈'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권리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장애인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회복하심으로써, 장애인을 돕습니다.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그가 행하지 않는 선이며, 그의 악행이 아니라, 그의 태만입니다.

4. 오늘은 교회가 정한 '장애인 주일'이고, '4.19혁명 기념주일'이자, '세월호 참사 2주기'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장애인을 차별하고 그들의 인간적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가 진짜 장애사회입니다. 295명의 세월호 희생자들과 9명의 실종자들을 기억하지 않는 사회가 진짜 장애사회입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사회가 진짜 장애사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 실존을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규정한바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 밖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도 세상 안에 삽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상처받고, 슬퍼하며, 좌절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분노하고, 병들어 아프고, 마침내 죽음에 이릅니다. 아무도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새로운 가치란 우리 시대의 '주류가치', '더 많이, 더 크게, 더 빨리, 더 높이'에 대한 '대항가치'이면서, '대안가치'입니다. '더 적게', '더 작게', '더 늦게', 더 낮게'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대감에서가 아니라 사랑에서부터 비롯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기쁘고 자발적으로 실천되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가치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또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이미 실현된 현실처럼 생각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미 보이는 것처럼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가능의 가능성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종교의 혁명적 본질입니다. '혁명'(革命)은 본래 '가죽에 쓴 신의 명령'을 의미했습니다. 혁명이 정치권력의 폭력적 이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지만 본래 혁명은 하늘의 뜻과 관계되었던 것입니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따르면, 혁명은 규칙적이고 순환적으로 움직이는 천구운동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은 기존 체제의 폭력적 전복이 아니라, 하늘의 질서를 이 땅 위에 실현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불가능한 새로운 가치를 이 낡은 세계 안에서 가능하게 하는 믿음이야말로 혁명적입니다. 다석 유영모는 '믿음'을 '밑바닥 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존재의 깊은 바닥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세상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신음소리, 우리 존재, 우주의 깊은 밑바닥 소리를 듣는 사람이 희망의 담지자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런 '희망의 담지자'(Traeger der Hoffnung)라고 확신합니다. 종교의 가르침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낡은 것이 아니고 여전히 인류가 그 곳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지혜의 보고라는 점에서 종교는 '오래된 새 길', '새로운 옛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오래된 새 길', '새로운 옛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혁명입니다. 칼 바르트는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을 때 하나님의 혁명이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듣고, 이들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혁명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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