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냥꾼이 있었다. 어느 날 사냥을 갔다가 큰 갈색 곰을 만났다. 그는 언젠가는 곰을 잡고 싶어 했고 마침 그렇게 할 제대로 된 총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곰이 시야에 들어오자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곰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미안한데, 총을 쏘는 것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 같이 협상해보자구."
사냥꾼이 말했다: "그러지 뭐. 나는 협상을 좋아해."
곰이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정확하게 뭐야?"
사냥꾼이 대답했다: "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모피 코트야. 너무 춥거든."
곰이 말했다: "그래. 좋아. 이제 서로 이야기가 좀 통하는 군. 우리가 약간의 타협점을 찾아보면 어떨까? 내가 원하는 것은 고픈 배를 채우는 것이거든."
그래서 사냥꾼은 총을 내려놓고 그 곰과 함께 숲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곰이 혼자서 나타났다. 협상은 성공한 것이 분명했다. 사냥꾼은 자기의 모피 고트를 얻었고 곰은 배를 채웠으니 말이다.
타협이란 원래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타협을 하는 교회에 대해 특별한 말씀을 전했다. 이 교회는 아시아에서 번화한 도시인 버가모에 위치해 있었다. 버가모는 바위 언덕에 세워져 있어서 맑은 날에는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이 도시는 그 당시에 아시아의 문화적 중심지였고 20만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소장한 거대한 도서관으로 유명했다.
버가모의 또 다른 명물은 제우스 제단이다. 그 제단은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일 정도로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가장 유명한 곳이다. 버가모에서는 제우스 이외에 디오니시우스와 구세주라 불리는 아스클레피우스 등의 신들도 숭배되고 있었다.
아스클레피우스는 치유의 신으로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 뱀으로 상징되었다. 사람들은 병의 치료를 받기 위해 원근각처로부터 이 신전으로 몰려왔다. 신전에서는 독 없는 뱀들이 이러저리 기어다니고 있었고 치료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로 뱀이 다가와서 접촉하게 되면 무슨 병이든지 어떤 질고이든지 모두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라: 사람들은 신전의 바닥에 누워있고 뱀들이 그들의 몸 위를 기어다니고 있다. <인디애나 존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지 않은가?
얼마나 오싹한 장소였겠는가!
게다가 버가모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쳐진 거대한 신전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란 말은 "신들에 속하는"의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 황제들은 숭배를 받는 한편으로 숭배를 요구하기도 했다. 버가모는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장소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버가모 교회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셨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요한계시록 2:13-15)
버가모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이 많이 있었고 예수께서도 그 점을 칭찬하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몇 가지 문제들도 도사리고 있었다. 이 교회는 자신들의 신앙을 타협하는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발람의 이야기를 언급하셨다. 그는 발락에게 고용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한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는 도중에 타고 가던 당나귀가 길을 벗어나서 그의 발을 벽에다 찧었다. 당나귀는 천사가 칼을 빼들고 길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놀랍게도 당나귀는 발람에게 말하기까지 했다. 결국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공략할 대안을 발락에게 일러주었다: 모압 여인들로 하여금 젊은이들을 꾀어서 우상숭배를 하도록 하라. 이 계획은 효과가 있었다.
버가모가 잘못한 일은 죄를 용납함이었다.
그것은 "이봐, 나는 기독교인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어"라는 태도를 반영한다. 사람들은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지옥처럼 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발람의 교훈을 새겨 들어야 한다. 타협하기 시작하면 당신의 영적인 삶은 약해지게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니골라 당도 역시 언급하셨다. 니골라 당의 철학은 결국 도를 넘게 될 방종을 반영한다. 그것은 "그렇게 엄격하지 않아도 돼. 너무 원칙을 따지지 마. 그저 잠깐 허리띠를 풀어놓을 수도 있잖아?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야. 하나님은 용서하셔. 하나님은 너의 진심을 알고 계시니까"라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문제는 타협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데 있다. 언제나 사소한 일들이 커지는 법이다. 그래서 타협이 당신의 삶으로 찾아오게 되면 당신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보고서 생각한다: "오, 나는 이런 규칙들은 전부 다 싫어하는데. 이런 기준들도 다 싫어 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식의 명령들을 좋아하지 않아.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기를 원해."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규칙들과 기준들과 진리들을 주신 이유가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그 죄의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선택의 여파를 직면해야 할 일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고대의 버가모 교회가 주는 교훈을 기억하라. 쉽사리 타협해서는 안 된다.
기사출처: http://www.christianpost.com/news/christians-dont-give-in-to-compromise-164253/#tIzJU2zOWvw5E3z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