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 41:8-10, 로마서 8:31-34, 누가복음 18:1-8
설교문
우리는 기도합니다. 늘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항상 응답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아마 목회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중환자 가족들이 목사를 불러 기적적인 치유를 위해 기도해 달라 요청했을 때, 목회자들은 병상 곁에서 무기력하게 서 있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로 교인들 가운데는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고민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의 응답에는 이루어짐, 지연, 거절 등 여러 응답이 있는데,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이 침묵이 길어질 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약해집니다. 결국 낙심하여 기도를 중단하게 됩니다. 믿음 자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오늘의 복음서(누가복음 18장) 말씀은 예수께서 왜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하는지 일러주시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특별한 비유입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2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재판관입니다. 같은 도시에 한 과부가 살았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재판관을 찾아가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곧 자기의 권리를 찾아달라고 졸랐습니다. 당시 철저한 가부장 사회에서 과부는 남편의 법적 보호를 조금도 받을 수 없는 최대의 사회적 약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 이 과부의 이야기를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5절, 공동번역) 하고 그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비유를 듣던 청중은 속이 다 시원하여 박장대소했을 겁니다. '비유의 달인'이신 예수께서 사실 코미디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사람들이 무릎을 치면서 웃는 모습을 우리는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여인이 그녀의 곤경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부패한 재판관의 문을 계속 두드렸다는 겁니다. 마침내 그 재판관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고 소리쳤다는 겁니다. '알았다니까요, 제발 그만 좀 두드려요! 지금 당장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요.' 청중은 웃음을 터뜨렸을 겁니다. 왜냐하면 주위에 이런 여인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항상 부당한 취급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남편도, 유산도, 사회적인 지위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청중은 이런 판사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도 경험한 판사입니다. 그 판사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봉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힘없는 여인이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그 뺀질거리는 작자를 짜증나게 해서, 그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닌데도 마침내 좋은 일을 할 때까지 괴롭혔다는 이야기에 그만 청중은 고개를 뒤고 젖히고 무릎을 치면서 속이 시원하여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좋은 이야기로군! 청중은 웃었고, 한숨을 쉬었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기도란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떠올렸습니다. 사실 이런 반응은 같은 비유의 말씀을 듣는 오늘 우리의 반응이기도 합니다. 실로 우리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문 앞에서 열심히 두드렸으나 응답이 없었을까요? 어린아이들이 암에 걸려 쓰러진 엄마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국 죽음은 찾아왔습니다. 거대한 자연재해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시기를 기도했으나 수많은 사람이 스러져갔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두 손 모아 기도했으나 갈수록 늘어나는 전쟁 희생자들 소식입니다. 교회 안에는 기도하다 지쳤거나, 이미 체념했거나, 이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 막연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대체 오늘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어떤 희망을 우리에게 주십니까? 왜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불의한 재판관과 어느 과부의 이야기는 거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유를 재미있게 들려주신 예수님은 이렇게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십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7-8a절)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불의한 재판관과 다르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최악의 재판관도 가난한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런데 거기도 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확실성을 말씀하신 주님은 이렇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툭 던지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b절)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새번역) 이 질문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뺀질거리는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의 이야기로 한참 웃던 청중은 갑자기 숙연해집니다. 기도하다 응답받지 못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의문이 생겨 낙심하고 기도를 중단하게 되었는데,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제자들에 대한 신뢰가 문제라고 물음을 던지고 계신 겁니다. 오늘의 공동 기도문에서 만난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신학자는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Can we believe God?)라고 물을 때 그 질문을 이렇게 180도 바꾸어 그 사람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을 수 있는가?'(Can God believe you?) 과학과 이성과 합리의 시대에 더 이상 신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바르트는 스스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충동적이고 이기적이며 비합리적이고 심지어 스스로 기만하는 존재인 인간을 과연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지 거꾸로 물었던 것입니다. "Can God believe you?"(하나님은 당신을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정당한 권리를 빼앗길 때, 속히 정의를 실현하셔야 할 분이 응답하지 않고 계실 때, 그리고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마저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만이 아닙니다. 구약성서의 하박국 선지자도 이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이니까...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하박국 1:2-13)
선지자의 피맺힌 탄원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그 과부의 항변이고 오늘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항변하는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의인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굳게 붙잡기 때문에 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으로도 이어져 사도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 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도대체 어떤 믿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수님은 세상에서 어떤 믿음을 찾고 계시는 겁니까? 뺀질거리는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어떤 근거로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8장에서 들려주신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두 단어로 표현해 보라면 저는 '끈기와 용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구의 끈기와 어떤 용기입니까? 우리의 끈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끈기입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를 관통하는 성서의 메시지 핵심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끈질기고도 흔들리지 않으며 포기할 줄 모르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범죄하고 타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 안에서 끈질기게 참으십니다. 우리는 조바심이 생겨 희망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끈기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이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죽기까지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끈기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정의가 찾아올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밤낮으로 외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반드시 들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끈기 있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에도 끈기 있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끈질기게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기도가 떠나거나 형식적 기도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모든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끈질기게 요구했습니다. 우리도 모든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 어두운 세계 속에서도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용기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기도하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끈기 있게 격려하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격려하십니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장미는 어떻게 / 심장을 열어 / 자신의 모든 아름다움을 / 세상에 내주었을까? // 그것은 / 자신의 존재를 비추는 / 빛의 격려 때문 // 그렇지 않았다면 / 우리 모두는 / 언제까지나 /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즈, <모두 다 꽃>) 겨울을 이겨 낸 장미가 봉오리를 맺는데, 봉오리는 망설입니다. 단단한 꽃받침을 열어 심장부의 꽃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추위와 벌레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봉오리는 어떻게 자신을 세상에 엽니까? 바로 '격려'입니다. 빛의 격려 때문입니다. 비의 격려, 꽃을 품은 땅의 격려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격려 때문에 봉오리는 용기를 내어 꽃을 피웁니다. 우리 모두 꽃봉오리입니다. 차갑고 무서운 세상에 대한 기억 때문에 우리의 희망과 믿음을 상실해도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의 끈질긴 격려 때문입니다. 빛이신 주님의 끈질긴 격려 때문입니다.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라고 했습니다. 밤하늘의 별은 언제나 거기서 반짝이지만 바라보지 않는 자에게는 빛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그 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새벽별인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 한 번도 포기한 적 없이 끈질기게 비추고 계신 저 고집스러운 사랑의 빛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빛이 우리의 희망이고 그 빛을 바라봄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뺀질대는 저 불의한 재판장도 그 끈질긴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런 기도는 행동하는 기도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브리서 11:1)이라고 했습니다. '실상'(實狀)이 무엇입니까? '실제의 상황'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실제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믿음은 단지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어떤 개념이나 신념이 아니라 지금 용기 있게 행하는 어떤 것입니다. 믿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희망입니다.
꽃을 보고 싶으면 먼저 꽃씨를 뿌려야 합니다. 메아리를 듣고 싶다면 먼저 산에 가서 목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산에 갈까 말까, 간다면 언제 가는 게 좋을까 생각하고 있으면 메아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꿀 한 숟가락은 벌이 4,200번 가량 꽃을 왕복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벌이 꽃을 찾아 날아가는 행동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꿀을 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면 꿀을 모으기 어려울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의 양들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로 발생하는 새벽이슬을 먹기 위함입니다. 해가 뜨면 이슬은 바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서둘러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양들이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면 그 양은 목마름에 시달릴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은 지금 용기 있게 행하는 어떤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무엇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사랑 많으신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제가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그분들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에 저는 반려견을 갖고 싶었고 3단 기어가 달린 멋진 자전거를 그렇게 소원했습니다. 어느 성탄절에는 백화점 진열대에서 본 움직이는 기차 장난감 세트에 혼이 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무얼 원하는지 너무도 잘 아셨지만 주시지 않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저의 부모님은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을 항상 주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반드시 주셨습니다. 내게 꼭 필요한 것을 아시고 그것을 반드시 공급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리고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응답은 우리가 응답이 올 때라고 생각할 때 오지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응답이기에 우리의 기대와 다를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베드로후서 3:8)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하나님은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이사야 5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눈으로 보기 힘든 시대를 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정의를 실현하십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1-32)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라고 이사야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나간 날 동안 우리의 도움이시고, 다가오는 날에 우리의 희망이시며, 폭풍우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피난처이시고, 우리의 영원한 집입니다."(Annie Dillard)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서는 우리의 하나님이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시편 68:5)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고, 자애로운 분이십니다. 정의롭지도, 자애롭지도 않은 재판장이 한 과부의 끈질긴 요청을 들어주었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어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모른 체 하고 오래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권리를 찾아 주실 것입니다. 속히 정의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고집스럽고 끈기있는 사랑을 바라보며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 열정적으로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주님이 오늘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기도합니다.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 위험에 처해서도 / 겁내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고통을 멎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 고통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인생의 싸움터에서 / 동조자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 인생과 싸워 이길 /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근심스런 공포에서 구원해 달라고 /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 자유를 싸워 얻을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나이다. / 도와주소서. // 일취월장하는 성공 속에서만 / 하나님이 자비하다고 생각지 말게 하시고, /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 하나님이 내 손을 / 힘껏 쥐고 계시다고 감사하게 하소서."(타고르, <참된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