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담임목사 이재철) 부설 양화진문화원(원장 김성환)과 도서출판 홍성사(대표 정애주)는 『로제타 홀 일기 3』을 발간했다. 양화진문화원은 2017년 말까지 『로제타 홀 일기』 시리즈를 모두 6권으로 발행할 예정인데, 2015년 9월에 『로제타 홀 일기 1』을, 2016년 3월에 『로제타 홀 일기 2』를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한국교회사와 선교사의 사역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로제타 홀 일기』는 한국에서 2대에 걸쳐 77년 동안 의료선교사로 헌신한 홀 선교사 가족 중 가장 먼저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의 육필일기이다. 이번에 출간된 『로제타 홀 일기 3』에는 로제타가 서울에서 맞은 두 번째 해인 1891년 5월 15일부터 1891년 12월 31일까지, 약 7개월 동안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로제타는 1890년 10월 14일 선교목적지인 서울에 들어왔고, 이후 선교지의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의료 활동에 진력했다. 이 책은 이후 그녀가 어느 정도 한국의 상황에 적응했을 때,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해가는 과정, 선교지에서 만난 동료 선교사들 사이의 갈등과 우정, 그리고 자신의 뒤를 따라 한국에 온 약혼자 윌리엄 홀과의 재회 과정과 그에 대한 사랑의 감정 등을 아주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의료 선교사로서의 정체성 정립해가는 과정 볼 수 있어>
로제타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선교사로서의 사명이 결국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보다 확신하게 되었다. 1891년 6월 29일 일기에는 이 같은 자신의 마음을 시를 통해 표현했다.
나는 단지 한 마리의 작은 참새입니다. 새 중에서도 미천한 새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내 인생이지만 자비로운 주님께서 보살펴 주십니다.
세상 곳곳에 수많은 참새들이 있고 흔히 그 참새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한 마리가 떨어져도 알고 계십니다.
로제타는 일기 곳곳에 그녀가 겪은 다양한 치료 사례를 기록했으며, 지극히 열악했던 당시 민중, 특히 여성들의 의료 환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로제타는 일기 뒷부분에 일기에서 기록하지 못한 치료 사례를 별도로 정리해 수록했다.
이 일기에서 특기할만한 내용으로 당시 병조판서였던 민영환의 초청을 받아 만찬에 참석한 1891년 5월 18일 일기를 들 수 있다. 만찬에는 로제타를 비롯해 2대 제중원 원장을 지낸 빈턴 선교사 부부와 1년 전 별세한 헤론 선교사의 부인 헤티 헤론 선교사, 벙커 선교사 부부, 군사고문으로 내한한 윌리엄 다이 장군과 닌스테드 대령 등 당시 조선에 와 있던 고위급 인사들이 초대되었다. 미국 공사였던 알렌 부부도 초청받았지만 선약으로 인해 불참했다고 기록했다. 로제타는 이날 민영환이 준비한 만찬의 규모와 격식이 참석한 이들이 모두 놀랄 정도였다며, "놀라운 만찬"이었다고 표현했다. 이날 준비된 음식은 모두 12가지 코스였고, 만찬의 순서와 음식의 질이 미국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였으며, 응대하는 이들의 매너도 최고 수준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날의 일기는 당시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운명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민중의 삶과 견주어, 당시 조선 궁정과 고위 양반들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고, 당시 개신교 선교사에 대한 조선 조정의 인식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선교사 사이의 갈등과 극복 과정도 솔직하게 기록>
『로제타 홀 일기 3』의 내용 중 흥미로운 부분은 동료 선교사와의 우정과 갈등에 관한 기록이 상당 부분 보인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당시 이화학당의 책임자였던 로스와일러 선교사와의 사이에 있었던 갈등은 꽤 깊었다. 무엇보다 의료 선교사와 복음 선교사 사이에서 서로의 일에 대한 견해 차이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해소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로제타가 로스와일러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그녀의 일기를 살펴보자.
어쨌든 내가 로스와일러 양을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녀와 나는 사뭇 달라서 그녀가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하듯이 나 또한 그녀를 오해하기 쉽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그녀가 장점도 많고 사랑도 많다고 믿는데, 나 자신이 갖고 있는 반감만 극복하면 될 것 같아 계속 노력해 보련다. "가장 어두운 시간은 바로 해뜨기 전이다."(1891년 11월 29일 일기)
그러나 로스와일러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한 달 만에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었다. 그날의 감격을 로제타는 이렇게 기록했다.
아, 그녀는 나에게 너무나 따스했다. 처음으로 그녀의 진솔한 마음이 나에게 와 닿았다. 그 마음은 나와 홀 박사 두 사람 모두를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이마에 '축복'(Godspeed)의 입맞춤을 해주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후로부터 그녀 는 나를 딴 사람처럼 대해 주었다. 애정 어린 자매 같은 따스함으로 너무 다정스럽게 대해 주어 나를 버릇없게 만들까봐 염려될 정도다. 이제야 내가 전에는 그녀를 전혀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1891년 12월 19일 일기)
이외에도 미국에서부터 함께 한국에 온 벵겔 선교사, 선교사 사회의 어른으로 활동한 스크랜턴 대부인, 아펜젤러와 윌리엄 스크랜턴 등 선배 남자 선교사와의 관계에 대한 기록도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 선교사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다.
<홀 선교사의 내한과 사랑에 관한 비화(秘話)도 담겨>
『로제타 홀 일기 3』에서 가장 특징적인 내용은 그녀를 따라 한국에 온 윌리엄 홀과 로제타와 사이의 사랑에 대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중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되어 짐까지 부쳤던 윌리엄 홀이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는 과정은 로제타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극적인 반전이었다. 그것도 그녀의 생일 날, 윌리엄 홀의 한국 파송이 결정되었다. 윌리엄 홀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로제타의 일기를 보자.
나는 한국과 한국인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사역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홀 박사가 이곳으로 파송된다는 것은 진정 놀라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을 위해 그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사실 내가 홀 박사를 이곳으로 이끄는 도구가 된 것이 한국 선교사역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라 느끼며, 이 특권을 부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를 이 길로 이끄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께서 '그대와 나 사이를' 지키고 계시니 절대 두려워하지 말아요. 주께서 당신 손을 잡으시고, 주께서 내 손을 꼭 잡으시고 우리를 가까이 지키고 계신다오."(1891년 10월 27일, 화요일 일기)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을 알아가는 로제타의 모습도 아름답게 만날 수 있다. 3권에 실린 마지막 일기에서 로제타의 남녀 간 사랑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전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널리 인용되고 있는 "사랑하다 헤어지더라도 사랑을 전혀 안 해본 것 보다 낫다"는 말이다. 나는 "아니야, 사랑은 하지 않는 게 좋아"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설사 어떤 연유로 내가 의사 선생과 헤어지게 되더라도 나는 우리의 사랑에 대해 더욱 관대한 사람이 되리라 확신한다.(1891년 12월 31일, 목요일 일기)
글/ 백시열 (양화진 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