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규 목사 #민주화 운동
민주화 운동의 거목 박형규 목사가 소천했다. 고 박형규 목사는 1967년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지냈으며, 1968년 기독교서회 발행 '기독교사상' 주간, 1970년 기독교방송 상무이사를 지냈다. 1972년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1992년 8월까지 20년간 시무했다.
'길 위의 신앙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던 고 박형규 목사는 민주화 운동 시절 여섯 차례 옥고를 치르는 등 민주화 운동 투사로서 활동했다. 박형규 목사는 사회적 영성을 삶 속에서, 길 위에서 실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본지와의 생전 인터뷰에서 박형규 목사는 '길 위의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상황이 저를 몰아갔지요. 고(故) 함석헌 선생님이 썼던 말이기도 하지만 제 인생을 돌아보면"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라는 말보다 더 함축적이고, 적확한 표현이 없을 것 같습니다"고 밝힌 바 있다.
박형규 목사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1960년 4월 19일에 있었던 4.19 혁명이었다. 그날 오전 간만에 야외에서 결혼주례를 서고, 교인들과 함께 퇴장하는 때였다. 갑자기 여기 저기서 총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이곳 저곳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의사들이 피를 흘린 청년들을 들것에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었다. "아차 이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나는 조용히 주례나 서고, 교회만 돌보고 있었다니.." 박형규 목사는 눈물을 울컥 쏟으며 현장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진 젊은이들 속으로 자신의 몸도 내던지려고 했으나 옆에 있던 교인들의 만류로 제지를 당했다.
그때 이후 박형규 목사가 부목사로 있던 공덕교회 교인들은 매주 주일만 되면 불안에 떨어야 했다. 4.19사태를 경험한 박형규 목사가 전에는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던 정치 얘기를 꺼내는가 하면 독재정권을 향해 과격한 비판의 메시지를 날마다 전하니 "이러다가 우리 부목사님 잡혀 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에선지 얼마 후 NCC에서 "목사님 유학 시험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았고, 교인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공부를 하러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인들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공안들에 끌려가 옥살이를 하게 될지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박 목사의 말대로 교인들은 그가 잠시나마 조용히 지내며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던 것이다.
뉴욕에 도착한 박형규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교인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해, 본 회퍼의 세속 신학 등 사회·정치 참여적 신학에 깊이 빠져들었고, 이 같은 에큐메니컬 신학은 크리스천으로서 사회적 책임에 관한 양심을 발동시켰다. 이 크리스천 양심은 귀국 후 그를 민주화 운동 중심에 서도록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 기장총회는 박 목사의 장례를 총회장으로 치를 예정이며, 5일장으로 거행한다고 밝혔다. 19일 오후 서울제일교회 주관으로 입관예식을 치른 후 20일과 21일 서울노회, 기독교빈민선교협의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천노회, 생명선교연대 등이 주관하는 추모예식을 드린 후 22일 오전 9시 기독교회관에서 총회 주관으로 장례예식을 드릴 계획이다.
이후 같은 날 12시 30분 서울제일교회 주관으로 파주 기독교상조회에서 하관예식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