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1월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다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 농민(세례명 임마누엘)이 25일(일) 오후 결국 숨졌다. 사건 발생 317일 만이다.
백 농민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학교병원은 24일(토) 저녁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의료진들은 그의 상태가 위중해 주말을 넘기기 힘들다고 보았고, 이에 가족들은 이날 저녁부터 중환자실에서 대기했다.
경찰의 행태는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경찰은 24일(토) 밤 10시를 넘긴 시각부터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이러자 백남기대책위는 공식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현재 파악한 것만 성균관대 앞, 창경궁 앞, 이화사거리에 경찰버스 20여대가 배치되어있고 장례식장 앞엔 사복경찰 100여명, 병원 건물 안에도 10여명이 들어와있다"며 서울대병원으로 와줄 것을 호소했다.
검찰과 경찰은 정확한 사인규명을 부검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백남기대책위는 성명을 내고 "직접적인 원인을 찾겠다며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게 된 것이 경찰의 물대포가 아니라고 발뺌하기 위해, 결국 국가폭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사건의 본질을 흐트려 물타기 또는 은폐하기 위한 파렴치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경찰, 사인 조작하려 병력 투입했나?
백 농민 사망 공식 발표 시점은 25일(일) 오후 1시58분이었다. 이때도 경찰은 약 3600명 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서울대병원 정문과 후문, 그리고 장례식장을 봉쇄했다. 이로 인해 부고를 듣고 조문에 나선 시민들은 경찰과 한동안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시민들 중 일부는 경찰과 충돌하는 등 긴장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대치상황은 오후 6시20분께 풀렸다. 현장에선 더불어민주당(더민주) 박주민 의원과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두 의원은 검찰과 검시관, 그리고 혜화경찰서장과 잇달아 접촉했다. 이후 검찰과 검시관이 장례식장에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은 철수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조문이 시작됐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경찰은 서울대병원 입구에 대한 통제는 풀지 않았고 이로 인해 조문 온 시민들은 큰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목정평) 전 상임의장 정태효 목사는 기자와 만나 경찰을 거세게 성토했다.
"경찰은 목사라고 해도 병원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막았다. 이렇게 비겁한 일을 계속해서 많은 시민들이 거부당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이 시대에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밤이 깊을 수록 새벽이 온다는데, 정말 새벽이 올 수밖엔 없다고 본다"
정 목사는 이어 백 농민에게도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정 목사의 말이다.
"얼마나 강건하셨으면 뇌사 상태에서도 300일 넘게 버티셨을까? 이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의 마음이 든다. 누워 계시면서도 농민들의 실상, 공권력의 무자비함 등 이 시대의 암흑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드린다"
한편 장례와 관련, 백남기대책위는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이 없는 가운데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