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복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한 작은 마을의 농사꾼으로 살았으나 훗날 전 세계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대국(大國) 건설의 아버지가 됐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얘기다.
28일 오후 1시 연세대 신학관에서 평화한국(대표 허문영)이 주최하는 리더십아카데미 제2강이 열렸다. 이날 강사로 초청된 임용순 교수(성균관대 명예)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리더십을 조명했다.
“워싱턴. 그는 고매한 인품과 타고난 천재성을 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인간적인 결함도 많았다. 공부도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도박이나 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더구나 그는 돈을 벌자 호화판으로 생활하며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처녀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여념이 없었고 친구 부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문제 많았던 시골 청년 워싱턴. 그는 어떻게 미국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까? 그가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겸손함이었다고 임용순 교수는 전했다.
그의 이런 겸손함은 군의 말단 병사에서 지휘관에 올랐던 워싱턴에게서 배려의 형태로 나타났다. 전쟁 중 아군이 아닌 적군을 지지하고, 협조해 준 식민지 주민들에게 철퇴 대신에 가족의 안전을 보장했고, 그를 배신한 장교들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다. 또 버지니아의 평범한 농부에서 부유한 농장주가 된 워싱턴에게서 겸손은 당시 소유물처럼 취급했던 노예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 교수는 그밖에도 워싱턴의 성실함과 건강을 꼽았다. 임 교수에 따르면 워싱턴은 주어진 일에는 성실하게 그리고 과학적으로 임했다. 이렇듯 그가 지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체구와 힘. 즉, 그의 건강함 때문이었다. 임 교수는 “그의 건강은 그를 인내력이 무척 강한 인물로 만든 중요한 요소였다”며 “그는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힘들고 귀찮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훗날 독립 전쟁 동안 보여준 그의 작전에서도 잘 나타나 (독립 전쟁을)승리로 이끄는 요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워싱턴의 성실함과 인내력은 임 교수의 말대로 전쟁터에서 돋보였다. 영국군과의 독립 전쟁 당시 미 대륙군의 총 사령관으로 선임된 워싱턴이었으나 그의 고민은 상당했다.
그가 지휘하는 대륙군은 전투 경험도 없고, 군기도 전혀 잡히지 않은 시민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던 것이다. 또 식민지의 시민들 중 상당수가 영국 정부에 충성을 하고 있었고, 군 보급 물품도 항상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런 악조건을 딛고, 초기 접전에 영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워싱턴에겐 성실함이란 강한 무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투를 하면서 군대를 조직하고 충원하며 훈련시켰다.
임 교수는 워싱턴이 거둔 승리의 비결을 꼼꼼이 짚어보기도 했다. 첫째 영국군이 미국 대륙군을 너무 업신여겨 방심했다는 것. 둘째 영국군의 후속 부대 충원이 늦었고 보급선이 자주 차단되었다는 점. 셋째 영국군이 주로 공격을 하고 미국군은 숨어서 방어를 하기 때문에 기동력이 좋고 지리 지형에 익숙한 대륙군이 전투에 유리했던 것. 넷째 워싱턴이 마음에 새겨 둔 것처럼 메사추세츠 주의 시민들이 대륙군을 열렬하게 지원했던 점 등을 승리의 비결로 꼽았다.
워싱턴은 환경에 매이지 않고, 여러 악조건과 역경을 이겨내고 이내 미국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독립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워싱턴은 결국 그 공로를 인정 받아 1789년 4월 30일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그러나 지위의 높 낮이에 상관없이 워싱턴의 겸손함은 과거 농부였을때나 군 지휘관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직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임 교수는 “당시 일부 사람들은 워싱턴이 국민의 인기를 등에 업고 독재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으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고 했다.
남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워싱턴은 메사추세츠 출신으로 북부를 대표하는 존 에덤스를 부통령으로 뽑았다. 북부와 남부의 정치적 균형을 이루려 했던 워싱턴의 배려였던 것이다. 또 그는 임기를 제한하지 않는 헌법 규정에 따라 세번 이상 연임할 수도 있겠으나 재임을 마치고 과감하게 퇴임하는 전통을 세우는 등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손색이 없게 스스로 앞장서서 실천했다고 임 교수는 덧붙였다.
워싱턴이 미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것은 그가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타이틀도 타이틀이겠지만 그가 끼친 영향력도 한 몫했다. 임 교수는 워싱턴이 미국에 끼친 영향력으로 ▲ 미국 독립 혁명을 승리로 이끔 ▲ 미국적 민주주의의 전통을 확립 ▲ 미국적 입헌주의, 법치주의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 ▲ 실용주의 정치의 전통을 미국에 뿌리내린 것 등을 꼽았다.
그런 워싱턴을 기리는 듯 오늘날 미국의 도시를 돌아보면 그의 이름이 없는 곳이 없고, 수많은 대학, 예술과, 연구소 또는 중고등학교까지 조지 워싱턴이란 이름을 사용할 정도가 됐다.
임 교수에 따르면, 아직도 미국에서는 헌법을 해석할 때나 독립선언문을 해석할 때 워싱턴과 미국을 건국한 국부들이 생각하던 뜻에 가깝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 워싱턴의 언행이나 고별사에서 원했던 대로 정치를 운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새로 출범한 미합중국 연방은 우리가 반드시 유지해야 하며 기존의 헌법과 정부는 존중되고 복종되어야 합니다. 특히 정치적인 위험성과 북부와 남부의 지역감정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미국이 어떤 나라와도 영구성을 띤 동맹관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제 사회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가능한 한 다른 나라의 정치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단지 통상을 대외정책의 기본원리로 삼아야 합니다…”(1797년 9월. 8년 임기를 마치는 워싱턴의 고별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