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한 달 가까이 신문·방송 머리기사에 빠짐없이 등장했던 이름이다. 그의 이름 앞엔 이런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비선실세'
말 그대로 비밀스럽게 대통령에게 선이 닿아 실권을 휘두른다는 의미다. 한 달 넘게 쏟아지는 비선실세 최순실의 행적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그런데 24일(월)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그가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44개를 미리 받아보고 첨삭을 했다는 것이다. JTBC뉴스룸 취재팀은 최순실의 사무실에 있던 개인용 컴퓨터를 분석해 이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연설문 가운데에는 박 대통령이 독일 드레스덴에서 ‘통일대박론'의 실천 방안을 밝힌 ‘드레스덴 선언문', ‘5.18민주화운동 기념사', ‘대통령 당선인 신년사' 등 주요 국정현안 관련 문건들이 포함돼 있었다. JTBC뉴스룸이 공개한 파일엔 연설문에 붉은 색으로 수정한 부분이 눈에 띤다. 이를 두고 최순실이 직접 첨삭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JTBC뉴스룸은 이에 대해 "다만 분명한 건 최 씨가 원고를 미리 받아봤고 그 가운데 붉은 글씨로 된 부분 등이 있는데 대통령이 읽은 내용은 아무튼 받은 것과는 달라져 있었다, 그런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가원수의 연설문 한 줄은 그 자체로 역사다. 존 F. 케네디가 동서 냉전이 첨예한 베를린을 방문해 독일어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Ich bin ein Berliner)"라고 한 연설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연설이다. 그래서 각국의 국가 원수들은 최고의 인재를 곁에 두고 연설문 초안을 작성하고 다듬어 최종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런 중차대한 연설문에 최순실이라는, 아무런 책임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자가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으니 도대체 대통령이 국정을 어떻게 운영했단 말인가?
비선실세의 존재, 민주주의의 위기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다시금 성찰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정해진 시기에 투표가 실시되면 투표장으로 달려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행사하는 게 다가 아니다. 이건 민주주의란 정치 제도를 이루는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민의'가 정치의 모든 과정에 반영되도록, 동시에 권력이 무소불위로 팽창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통해 묶어 두는 것이다. 최고 권력자와 법을 만들 사람들(즉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는 건, 민의가 권력행사와 입법에 스며들도록 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최고 권력자는 끊임없이 민의를 구하고 쫓아, 민의를 거스르지 않게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리고 입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최고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의무를 짊어진다. 이 모든 과정은 민주주의 제도를 작동하게 하는 요체다.
박근혜 정권은 이런 작동원리를 간과했다. 대통령은 임기내내 민주주의적 의견 수렴 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국정을 밀어 붙이기 일쑤였고, 청와대 참모진 이하 모든 국가기관은 대통령 심기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백보양보해 최고 권력자가 인성이 참으로 되먹지 못했고, 국민을 생각하기보다 출세만 바라는 자들만 요직에 앉혀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치자.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해 나가려면, 법이 규정하는 정당한 절차를 통해 적절한 인사를 선발하고 이들과 협의를 통해 정책을 펼쳐 나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은 이를 도외시하고 최순실이란 사람을 끌어 들였다.
최순실이란 자가 대통령의 정신세계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한국일보>에서는 그와 대통령의 관계를 ‘영혼의 인연(soul tie)'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람은 관계를 맺는 존재여서 누구와도 깊은 교분을 나눌 수는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법이 정한 절차를 통해 인사를 선발하기보다, 정체마저 베일에 휩싸여 있는 최순실에게 사실상 위임한 건 ‘영혼의 인연'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대통령이 자주 사용한 말로 ‘국기문란'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따져보자. 대통령의 비선실세가 재벌에게 수백억의 돈을 ‘갈취'해 재단을 만들어 호의호식하고, 그 실세의 딸이 부적절한 특혜를 받으며 명문 학교에 입학해 또 특혜를 누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비선실세가 국가의 운영방침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연설문 작성에 개입한 게 국기문란이 아니면 무엇이 국기문란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비선실세의 존재는 보수,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아니, 지난 2012년 선거에서 현 대통령에게 한 표를 던져준 이들은 더 크게 분노해야 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준 건, 대통령에 올라 나라를 더 잘 이끌어 달라는 열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지금 대통령은 이 같은 열망은 안중에도 없이 비선실세에게 기대어 왔으니 이는 유권자들에 대한 배신 아닌가? 이런 배신의 정치를 유권자가 심판하지 않으면 누가 심판하는가?
현 대통령의 죄악은 결코 작지 않다. 그를 맹목적으로 지지한 자들의 과오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을 마치 하나님 섬기듯 한 목회자들도 많다. 이들의 죄악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 수치스러운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리자. 그래야 후손들이 선대의 수치를 기억하면서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