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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만약’이란 질문을 던진다면?

아무 검증 없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정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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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KBS 보도화면 갈무리)
최순실-최태민 부녀의 대를 이은 국정농단에 기독교계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음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이 언론을 통해 잇달아 공개되고 있다.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연일 나라가 떠들썩하다. 이번 파문은 기독교계도 책임을 져야할 주요 당사자다. 최순실의 아버지 고 최태민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라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최순실이 전 남편 정윤회와 딸 정유라와 함께 압구정동 A교회에 출석했다는 점, 그리고 보수 기독교계가 박 대통령을 무조건 추종해 왔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더구나 보수 기독교계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한일 위안부 합의, 개성공단 폐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등 민족의 명운이 달려 있는 사안이 불거질 때 마다 정부편을 들었기에 현 정부에 부역했다는 비난은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보수 기독교계가 박근혜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 그가 어떤 신앙관을 가진 사람인지 최소한의 검증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지난 2012년 대선 당시의 일이다. 대선을 엿새 앞둔 12월13일, 소셜 미디어는 발칵 뒤집혔다. 이날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신천지와 관련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문은 다음 날 바로 가라앉았다. 이때 소방수로 등장한 장본인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었다. 한기총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밝혔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신천지가 연관이 있다'는 루머가 이미 6개월 전에 입수가 되어 여러 경로를 통한 자체 사실관계 조사 결과 박근혜 후보와 신천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고 그러한 루머는 사실무근임을 확인하였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역시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한 표 한 표가 모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완성하는 중요한 시점에 거짓이 난무하는 구태가 반복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한기총의 기자회견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박 후보의 신천지 연관성을 한기총이 나서서 부인한데 대해 보수 기독교계가 특정 후보를 편드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었다. 공교롭게도 한기총의 기자회견은 새누리당사에서 이뤄졌다. 게다가 당시 대표회장이던 홍재철이 "사이비종교에서 운영한다는 천지일보 행사에 민주통합당 이해찬 전 대표와 김영진 전 의원이 참석해 축사를 한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야당 인사들을 함께 엮었기에 이 같은 지적은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이런 지적과 무관하게 신천지 관련 의혹은 물타기 됐고, 박 후보는 대통령에 올랐다.

지금 교단을 막론하고 기독교계는 신천지에 골머리를 앓는다. 신천지 추수꾼 출입을 금한다는 포스터가 붙은 교회는 찾기 어렵지 않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방송사는 신천지관찰보고서를 제작해 방송했고, 한기총 역시 신천지 척결 운동에 열심이다.

역사는 만약이란 의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약이란 가정을 해보자. 한국교회가 신천지를 경계하는 열심으로 박 후보를 검증했다면 과연 그가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을까?

최순실 파문이 일깨운 한국교회의 직무유기

지도자의 정신 건강은 무척 중요하다. 국정을 이끌어가다 보면 정말 중요한 의사결정의 순간이 다가오는데, 그 순간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 나라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공산주의 붕괴 직후 러시아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던 옐친은 보드카에 취해 비틀거렸다. 그가 집무실에 처박혀 혼자 홀짝 거리며 마셨다면 모르겠다. 그는 보드카에 취해 미국의 워싱턴 거리를 배회하는가 하면 독일을 방문했을 땐 술에 취해 예정에도 없는 연설을 했다. 보드카에 취해 비틀거리는 옐친의 모습은 세계 언론에 보도됐고, 이를 본 세계인들은 옐친을 주정뱅이라고 비아냥 거렸다. 지도자가 보드카에 취해 비틀거리는 순간, 루블화 가치는 폭락했고 러시아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일이나 일본, 심지어 한국의 나이트클럽에까지 와 반라로 춤을 춰야 했다.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 조지 W. 부시는 더욱 심각했다. 부시 행정부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위원으로 재직하며 국가안보정책 수립 임무를 담당했던 리처드 A. 클라크는 그의 저서 <모든 적들에 맞서>에서 이라크 침공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부시의 정신세계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9.11테러가 있고 나서 바로 부시 대통령은 ‘알 카에다 지도부'에 대한 챠트와 카드를 보자고 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하버드대 경영 대학원에서 적대적 인수 문제를 풀 때와 같은 방식으로 이들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알 카에다 요원이 잡히거나 사살될 때 마다 그 사진에 X표시를 해서 테러와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황을 점검하겠다고 했다. 백악관 벽난로 옆에 앉아 알 카에다 조직원들의 얼굴에 빨간색으로 X표를 치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혼란스런 기분이 들었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차례로 유린해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신세계를 감안해 본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박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차세대 전투기 도입, 그리고 개성공단 폐쇄 등 우리 군의 전력 향상과 남북화해를 상징하는 사업에 최순실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토록 심각한 현안에 무자격자가 개입했으니 나라가 온통 혼란에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이미 기독교계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장로라는 이유만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바 있었다. 이어 박근혜라는, 정신세계가 사뭇 의심스러운 사람이 국가 최고 책임자로 오르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지금에서야 몇몇 언론을 통해 그의 당선을 위해 신천지와 접촉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으니, 이런 뒷북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판단이다.

무엇보다 기독교계는 국가와 국민 앞에 대오각성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또 중요한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후보자들의 면면을 면밀히 검증해 이명박-박근혜 같은 함량 미달의 정치인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지유석 luke.wycliff@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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