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대권도전에 성공했다. 선거 막판까지 민주당 힐러리의 낙승이 점쳐지는 분위기였기에 트럼프의 당선은 예상외의 결과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기득권 정치 바깥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에 이어 대통령 당선까지 기염을 토한 트럼프의 승리 요인과 한국에 미칠 파장을 두 번에 나눠 분석해 본다. 편집자 주]
현지시간으로 8일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아마 TV만화 영화 <심슨>의 작가를 제외하고, 그 어느 누구도 트럼프가 대권을 거머쥐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드러내놓고 상대방인 힐러리를 지원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던 <뉴욕타임스>는 말할 것도 없었고 보수 성향이 강한 <워싱턴포스트>까지 트럼프의 당선을 경고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를 거침없이 평가 절하했다.
"편협하고 무지하며 남을 속이고 자기도취에 빠졌으며, 앙심을 품고 옹졸하며, 여성을 혐오하고 예산계획이 무모하며, 지적으로 게으르고 민주주의를 경멸하며, 미국의 적들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트럼프는 보란 듯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결과에서도 289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218명에 그친 힐러리를 여유 있게 따돌렸다. 참고로 미국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다. 각 주마다 정당 별로 선거인단을 두고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선거인단에 투표하는 방식이다. 단, 만약 선거인단 투표에서 민주-공화 어느 쪽에서든 한 표라도 더 많은 표를 얻은 후보는 상대편 선거인단까지 독차지한다. 이를 ‘승자전취(Winner takes it all)'라고 한다.
'저렴한' 화법에 반이민·여성혐오를 부추기고, 공약으로 승부하기 보다는 상대의 허물을 찾아 공격해 늘 논란을 일으켰던 트럼프는 아무리 따져보아도 세계에서 가장 힘센 자리인 미국 대통령과는 맞지 않아 보인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미국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가? 실제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캐나다 이민국 홈페이지 접속이 폭주해 서버가 다운됐을 정도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트럼프는 밑바닥 정서를 제대로 공략했다. 지금은 자본과 노동이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드는 시절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세계화'라고 한다. 중국이나 인도 노동자들에게 세계화는 값싼 노동력과 동의어다.
한편 미국 제조업은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미시건이나 오하이오, 디트로이트 등에 있던 공장 설비를 중국으로 옮겼다. 따라서 미국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저소득층에게 세계화란 실업과 같은 말이었다. 한 예로 미시건주의 제너럴 모터스 공장 노동자들은 회사가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면서 대량실업이란 재앙을 감수해야 했고, 제조업이 번창했던 이들 지역은 ‘러스트벨트'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
‘미국 우선' 내세우며 러스트 벨트 공략
이 와중에 트럼프는 ‘미국이 우선(America First)'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왔다. 즉 국제주의를 버리고 고립주의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상징적인 수사만 남발하지 않았다. 특유의 거침없는 언변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맹공격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재협상하겠다고 했다. 트럼프는 지난 7월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노동자를 해치거나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해치는 어떤 무역협정에도 서명하지 않겠으며 대신 나는 개별 국가들과 개별 협상을 벌이겠다."
일련의 자유무역협정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분노했던 노동자들은 트럼프에게 열광했다. 이번 대선 투표 결과 트럼프가 미시건, 오하이오, 위스콘신 등을 ‘접수'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특히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텃밭이나 다름없던 지역이었기에 힐러리로서는 더욱 뼈아팠다.
오바마 정부의 실책도 빼놓을 수 없다. 오바마는 변화의 열망을 등에 없고 미 헌정 사상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에 올랐다. 무엇보다 오바마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2008년 미국 금융위기였다. 그러나 집권 이후 오바마의 행보는 실망스러웠다.
미 금융위기는 골드만 삭스, 리먼 브러더스 등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이 고도의 투자상품을 개발해 고객의 예금을 마구잡이로 운용한데서 비롯됐다. 오바마는 이 엄청난 사태를 조장한 책임자들에게 사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금융자본 임원들은 정부의 보조금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바마는 골드만 삭스 출신의 티모시 가이트너를 나라 살림을 주무르는 재무장관에 기용했다.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탐욕을 비판해온 시민단체들은 오바마 행정부를 ‘월스트리트 정부'라고 비아냥 거렸다. 이 광경을 본 미국인들은 힐러리 역시 금융자본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한 후보라고 보았다.
트럼프의 당선이 확실시 되자, 세계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이전부터 세계 각국은 트럼프의 등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국 우선'을 내세우며 미국이 고립주의로 돌아설 것이란 염려가 불안감을 가중시킨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미국의 고립주의가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지금 세상이 불안해진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의 과도한 개입 때문이었다.
미국은 2001년 아무런 정치적 청사진 없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로 인해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정세는 일대 혼란이 일었고, 결국 이슬람 국가의 준동(IS)으로 이어졌다. 좀 더 이전,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마약 카르텔을 정책적으로 후원했다. 이 지역의 가난한 농민들이 좌익 게릴라들에게 선동당할 것을 우려해 취한 조치였다. 미국은 심지어 선거로 선출된 정부를 무너 뜨리기도 했다. 1973년 미국은 칠레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한 아옌데 정권이 들어서자 군부를 사주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차라리 트럼프가 자신의 공약을 지켜 고립주의로 돌아서주기 바란다. 아마 지금보다는 세상이 덜 불안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