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경재 목사 1998년 7월 5일 설교

경동교회/ 당시 경동교회 협동목사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창세기 22장 7~8절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사람이 함께 걸었다.
히브리서 7장 26~27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제사장으로 계시기에 적격이십니다. 그는 거룩하시고, 순박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구별되시고, 하늘 보다 높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다른 제사장들과는 다릅니다. 다른 제사장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지만 그는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바치셔서,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6~30절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죄를 사하여 주려고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찬송을 부르고, 올리브 산으로 갔다.
 

 

모든 형태의 종교적 제의 중심엔 '희생' 또는 '희생제물'이 있습니다. '제례(祭禮)', '전례(典禮)', '예배(禮拜)' 라고 말할 때 공통되는 "禮"라는 글자의 구성자체가 '위에서 내려오는 신령의 강림을 앙망하면서 젯상에 제물을 차려놓은 모습의 상형문자'입니다. '희생제물(sacrifice)'이란 다른 생명들을 살려내기 위해 드리는 제물을 일컫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대들은 하나님께 몸으로 드리는 산 제물이 되시오'라는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은 다른 생명체를 죽여서 바치는 제물대신에 자신의 몸을 그대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바른 예배요 참 예배라는 것입니다. '희생' 또는 '희생제물'이란 고대종교의 야만적 유산이 아니라 엄존하는 '생명의 원리'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희생제의가 말하려는 본래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이란 생명으로서만 속죄된다는 것, 생명은 생명의 희생 위에서만 자라난다는 것, 파괴된 생명질서의 회복을 위해서는 대속적 희생제물이 생명의 제단에 바쳐져야 복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 독자 이삭사이에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며 길 위에서 주고 받는 대화는 바로 희생 또는 희생제물의 근본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 제물로 바쳐질 이삭은 자기 자신이 번제로 바쳐질 제물 그 당사자인줄도 모르고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는데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찢어지게 아픕니다. 제물이 자기자신의 생명의 분신인 아들 이삭이기에 제물이 누구인가를 아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그렇게 아팠던 것입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은 우리 생명의 두 가지 의식이라고 봐도 좋은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분리되어 있는 대국구조라고 봐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면서 동시에 이삭인 것입니다. 사람은 이삭처럼 번제물로서 자기가 작정된 것임을 모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처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설적 동시성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언제나 희생제물의 선택과 제물로 바쳐지는 운명적 과정은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인 매우 역설적 양면성을 지닌 것입니다. 100세에 얻는 독자 아들을 다시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말이 안되고, 종교적 성실성으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은 바치지 않을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주저함 없이 결행을 합니다. 아무도 아브라함의 모리아산행을 강행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당당히 한 부족의 족장입니다. 아브라함은 부당한 하나님의 이삭 제물 바치기를 거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발적으로 자기분신인 아들을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묘한 생명의 내적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희생 또는 희생제물 되기란 항상 피동적 측면과 능동적 측면이라는 양측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것을 명료하게 드러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희생제의 원형적 범례인데, 예수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기득권자들 그리고 로마제국의 권력의 야합에 의해 처형당한 '십자가에 못 박히심(Cruxcification)'이기 때문에 피동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이 잔이 자기에게서 가능하다면 지나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복음서는 동시에 스스로 그 쓴 잔을 마시기로 결단하고 의연히 골고다로 나아가서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고 스스로 제물이 되어서 단 한번에 희생제의 본질을 완성하신 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하기를 아무도 내 생명을 빼앗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만 내 스스로 내 생명을 너희를 위하여 내어준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깨뜨림으로 드리는 희생의 제사가 낡아져 버린 모든 생명 관계를 다시 갱신하는 능력과 계기가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왜냐하면 희생제란 본시 깨어져 버린 계약, 혼돈으로 뒤죽박죽된 생명질서, 낡아져 버린 병든 생명을 다시 바르고 건강하고 충만하게 다시 세우는 일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정결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하고 거룩해야 할 '생명자체'가 '오물과 혼돈적 무질서'로 침범 당했을 때 그 생명실재를 정화시키고 질서에로 바로잡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과정이 '희생' 또는 '희생제물'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하나 든다면, 홍수라는 절대혼돈 상태에서 나온 직후, 노아의 가족은 정결한 짐승 암수 한쌍 씩을 취하여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그리고 나자 생명의 계약이라는 무지개의 새 계약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렇게 이해할 때 희생제물은 선, 진리, 정의를 짓밟는 개인이나 집단공동체에게 가해지는 심판임과 동시에 그것을 치유하는 속량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한편에서 보면 한민족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 한국동란에 죽임 당한 300만 생명들, 분단시대의 800만 이산가족의 슬픔, IMF시대에 시달리고 고통 당하고 실직 당해야 하는 국민들은 어떤 의미에서 '생명의 근본원리' 안에서 희생제물이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한민족의 고난의 역사란 결국 우리 민족이 생명의 왕국에서 준수해야 할 생명세계의 기본법 곧 '진실과 공의'를 배반하고, 침범하고, 유린한 대가요, 심판이었음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동시에 한민족의 과거와 오늘의 고난 역사는 그 생명왕국의 기본법인 '진실과 공의'를 배반 유린한 결과로 초래된 생명공동체의 혼돈 상태를 회복하기 위하여 치러지는 통과제의적 정화과정 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 엄숙한 생명원리를 깨닫고 우리 민족이 오늘의 고난을 당하면 그 모든 역사적 역경과정은 전화위복이 되지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당하면 한민족의 시련은 더욱 더 미래에도 가중될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동산과 역사왕국의 엄숙성입니다. 절대자는 종교적으로 말할 때는 거룩한 하나님 이시지만, 비종교적 표현으로 일반적으로 알아듣게 말한다면 결국 '생명자체', '역사자체'입니다. '희생제물'을 요청하는 궁극적 실재를 위에서 보면 하나님이고, 과정에서 보면 역사 그 자체이고, 아래 바닥에서 보면 삶의 실질적 담지자 민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실재, 역사 실재, 민중실재가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셋은 한 생명실제를 구성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셋 사이는 구별해야 하지만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분리하는 순간 셋은 살아있는 생명실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원리들로 변해버리게 되니까요.

우리교회는 매월 첫주일 예배시간에 성찬식을 갖습니다. 성찬식은 참으로 생각 할수록 신비롭고 은혜로운 예식입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습관에 젖고 감격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시에 "이 예식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하신 것처럼 세상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거룩한 예수님의 희생제를 '재연하는 것'입니다. 참된 의미에서 거룩한 공연입니다. 거룩한 '성례전적인 공연(Sacrimental Performance)을 통하여 일체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창조적 변환의 논리가 기조를 이룹니다. 단순한 과거사건의 기념식 같은 반복이 아닙니다. 물질로서의 "빵과 포도주"가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살이요 피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처럼 세계, 역사, 우주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극치가 일으킨 그 창조적 변화능력에 의하여 변환되는 것입니다. 우주와 역사세계는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의 심장을 그 중심 핵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장성하고 숙성되고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주적 그리스도' 선언입니다.

본래 '희생'은 상실해버린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사람의 얼굴을 되찾고, 깨어져버린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자연이 바른 관계회복을 성취하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 이삭처럼 "번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는 형국입니다. 성경 본문이 말하는 대로 번제물은 다른 어디에도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곧 번제물이고, 희생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고 또 진실인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삼으시고 당신 자신이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 되셔서 단 한번 영원한 구원의 제사를 완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신 생명을 증언하고, 선포하고, 확장하고,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도록 연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되도록 뭄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봉사, 정의의 실현, 진실의 육화를 통한 산 제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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