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박정희 독재 시절, 권력은 국민에게 무한 복종을 요구했다. 만에 하나 정권의 치부를 건드리고, 정권을 비판하면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그런데 복종도 시효가 있기 마련이다. 어제의 치어리더가 일순간 반체제 인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박정희 정권은 야비하게도 어제의 치어리더마저 가혹하게 대했다. 임찬상 감독의 2004년 작 <효자동 이발사>는 이발사 성한모의 눈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매몰참을 비꼰다.
성한모(송강호)는 청와대 들머리인 효자동에서 조그만 이발소를 운영하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이발소 자리 탓에 한모는 이승만이 4.19로 쫓겨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공교롭게도 첫 아들 낙안이가 태어나는 날이 바로 4.19였기 때문이다. 한모는 손수레에 산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 김민자(문소리)를 태우고 시위대 속을 비집고 다닌다.
한모는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청와대로 진격하는 장면도 본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5.16은 한모에겐 인생역전의 기회를 열어준 사건이었다. 쿠데다 직후 한모는 이발소 주위에 수상한 사람이 서성이는 걸 보곤 혹시 간첩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리곤 거동 수상자를 다짜고짜 붙잡고 경찰을 부른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거동 수상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 이 일로 한모는 청와대로 불려가 중앙정보부장에게 인정사정없이 정강이를 걷어 차인다.
그러나 한모는 이 일로 출세가도를 걷는다. ‘각하'(조영진)의 눈에 들어 이발실장으로 전격 임명된 것이다. 그는 지근거리에서 각하를 수행하며 각하의 스타일 관리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다. 각하의 신임도 두터워 미국 방문길에 그를 대동하기까지 한다.
한모는 승승장구했지만, 이내 고난이 찾아온다. 어느 날 청와대 뒷산에 간첩이 침입한다. 그런데 간첩들이 갑자기 설사를 한다. 그러다 순찰 중인 군인에게 발각되고 이내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진다. 이후 정부는 설사병을 간첩이 퍼뜨린 ‘불순한' 병으로 규정한다. 이러자 심한 설사를 하기라도 하면 간첩으로 낙인찍혀 이웃끼리 고발하는 일이 벌어진다. 한모의 아들 낙안이(이재응)도 심하게 설사를 한다. 한모는 아들이 간첩이 아니라며 자진해서 경찰서로 데리고 간다.
무소불위 절대 권력자 vs 힘 없는 소시민
한모는 하루 이틀 지나면 낙안이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낙안이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전기고문을 당한다. 연출자인 임찬상 감독은 낙안이가 고문 당하는 장면을 상당히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이 때문에 개봉 당시 고문을 너무 희화화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한편 한모는 낙안이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한번은 선물 보따리를 들고 대통령 비서실장인 장혁수(손병호)에게 찾아가 아들을 구해달라고 애원한다. 장혁수는 그런 한모에게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들이대며 온갖 막말을 퍼붓고 자리를 뜬다. 그러면서도 한모가 준비한 선물은 살뜰히 챙겨간다. 그 시절 박정희 대통령 주위의 참모들이 얼마나 안하무인이었는지 생생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한모는 결국 낙안이를 데리고 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낙안이는 더 이상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다. 그제사 한모는 마음 속에 쌓아 왔던 분노를 폭발시킨다. "야 이 나쁜 놈들아!"라고 울부짖는 송강호의 연기는 지금 다시 보아도 보는 이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든다.
각하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한모였지만, 아들을 구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오히려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모욕만 당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다. 이발 도중 각하에게 던진 한 마디 때문에 오싹한 긴장이 흘렀을 정도로 한모의 처지는 초라하기만 하다.
각하와 한모는 어느 덧 백발이 희끗한 초로의 신사가 된다. 둘은 이발을 하면서 함께 지내온 나날들을 추억한다. 각하가 먼저 성한모에게 묻는다.
각하 : 성 실장, 얼마나 일했지?
한모 : 12년 했습니다.
각하 : 참 오래 하는군.
한모 : 각하도 참 오래하셨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각하의 시선은 한모에게 향하고, 이러자 한모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진다. 이 장면은 무소불위의 독재권력과 소시민의 처지가 잘 대비되는 명장면이다.
국민에게 무한복종을 요구하는 모습은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또 정권에 밉보인 이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모습도 아버지 때와 판박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대통령의 머리 손질이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고 있다. 세월호가 맹골수도의 차디찬 바닷물에 가라앉던 시각, 대통령이 머리 손질을 했다는 정황이 <한겨레신문>과 SBS를 통해 불거진 것이다. 대통령의 헤어스타일은 국가 이미지와 직결되기에 신경을 기울일 필요는 있다. 그러나 국민 304명의 생명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었다면, 머리를 손질하다가도 곧장 뛰쳐나왔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박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머리 속에 국민의 존재가 있기나 한지 궁금하다.
대통령의 머리를 만졌던 미용사는 SBS기자에게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했다. 대통령의 스타일을 관리해준 전속 미용사마저 모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니, 이 미용사의 말에서 영화 속 성한모의 초라한 처지가 오버랩된다.
만약 박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효자동 이발사>는 박정희 시절을 풍자하는 잔혹동화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잔혹동화는 2016년 우리 모두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끝은 어디일까? 이 악몽이 하루 속히 끝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