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 백남기 농민, 317일간 투병 끝 숨 거둬
지난 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 농민이 사건발생 317일만인 9월25일 끝내 숨을 거뒀다. 고 백남기 농민은 중앙대 재학시절인 1973년 유신 철폐 운동하다 수배돼 무기정학 처분받았고, 1980년 5월 17일 5.18 계엄포고령 선포 전에 학교 기숙사에 있다가 연행됐었다. 그러다 1981년 3월 가석방으로 풀려난 뒤, 고향으로 내려와 30년 넘게 농촌·농민운동에 전념했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은 지난 생만큼이나 순탄치 않았다. 경찰은 사망소식이 들려오기 무섭게 3천 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고인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병원을 에워쌌다. 그의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시신부검을 하겠다는 게 이유였다. 한편 고인의 주치의였던 백선하 서울대병원 신경외과장은 사인을 병사로 규정해 또 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대병원은 합동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려 재조사에 나서 사망진단서 재검토에 들어갔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시민들이 나섰다. 시민들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와 고인의 시신을 지켰다. 경찰은 부검영장 집행을 시도했지만, 시민들은 말 그대로 몸을 던져 저항했다. 이 와중에 최순실 국정농단이 불거졌고, 경찰은 영장집행 명분을 상실했다.
그는 숨을 거둔지 41일만에 세상과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제대로 된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의 장례를 모시는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싸움의 시작"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7)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 박형규 목사 타계
지난 8월 민주화운동의 산증인 고 박형규 목사가 타계했다. 향년 93세. 고 박 목사는 1974년 유신 시절 대표적인 시국사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을 선고 받은 일을 포함해 모두 여섯 차례 옥고를 치렀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박 목사가 시무하던 서울제일교회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폭력배를 동원해 예배를 방해하고 목회자에게 협박을 가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폭력배 중엔 1986년 서진 룸사롱 집단살인 사건에 가담한 자가 섞여 있었다고 하니, 그 탄압의 정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계기는 4.19혁명이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마포, 공덕동은 가난한 동네였다. 집이 없어서 굴속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인이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 갔다가 나오면서 봤다고 말해주는데, 총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뛰어다니고 있는 거였다. 그때가 4․19 사건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갔는데, 피 흘려 다친 사람이 모이고, 사람들이 숨 가쁘게 뛰어다니던 모습을 보았다. 그때 큰 충격을 받았어. 목사가 돼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너무 무관심했구나 생각했다. 난 죽어가는 학생들 뒤를 따라가면서 많이 울었다."
감옥을 그야말로 제집 드나들 듯 드나 들었으면서도, 이를 당연시 했던 고 박형규 목사. 고인의 생은 약자의 아픔을 보듬기보다 세속 권력자의 심기 챙기기에 더 급급한 이 시대 교회의 현실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8) 한신대 총장 선임 갈등
올해 한신대학교는 신임 총장 선임 문제를 둘러싸고 홍역을 치렀다. 발단은 이사회와 학내 구성원들의 갈등이었다. 총학생회와 교수협의회는 자체 총투표를 실시해 1순위 후보를 확정했다. 그러나 이사회는 "총장 선임은 이사회의 고유권한"이라며 학내 구성원들의 뜻을 거부했고, 총장 선임 투표를 강행해 강성영 교수를 신임 총장으로 선임했다. 학생들은 즉각 반발해 이사회가 열린 장공관 회의실을 점거하고 약 14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사회는 이에 맞서 경찰 병력 출동을 의뢰하는 한편, 관련학생들을 고소고발했다.
이사회의 불통 행보는 여론의 집중 성토를 받았다. 특히 경찰병력을 학내로 끌어들인데 대해 총회 내부에서 "스승으로서의 본분을 상실한 것이요, 학교 행정의 경직성과 문제해결 능력이 없음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이어 총회 전직 고위 간부가 이사회의 개방이사에게 총장선임결의에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압박했다는 정황도 불거져 나왔다.
기장 총회는 9월 총회에서 인준을 부결했고, 이에 강 총장 서리는 사표를 제출했다. 이사회에 대해서도 자신사퇴촉구가 결의됐다. 그러나 이사회는 묵묵부답이다. 총장 선임을 둘러싼 갈등은 끝내 해를 넘기게 됐다.
9) 성추문으로 얼룩진 교회
목회자들의 성폭력은 한국교회의 고질병이다. 올해도 목회자의 성추문은 이어졌다. 먼저 8월 청소년 선교단체인 라이즈업 무브먼트 이동현 목사가 자신의 지위와 성경 말씀을 이용해 한 여성의 정신세계를 조종하고 해당 여성을 성적 갈증 해소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로 드러났다. 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9월 또 다시 성추문이 불거져 나왔다. 장본인은 중국동포교회 김해성 목사였다. 김 목사는 이주민 사역의 대표주자로 알려진 인물이기에 파장은 컸다.
목회자의 성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근본 이유는 교단 안에서 제대로 권징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전병욱 전 삼일교회 담임목사다. 올해 2월 예장합동 평양노회는 전병욱 전 삼일교회 담임목사에게 공직정지 2년과 해당 기간 중 강도권(설교 정지) 2개월 정지 처분을 내렸다. 다수의 성추행 의혹이 있었으나 평양노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또 1)사임 후 2년 내 개척금지 약속, 2)수도권 개척 금지 약속, 3)1억 원의 성 중독 치료비 지급 등 그동안 쟁점이 됐던 사안에 대해서도 사실무근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예장합동 총회는 더 이상 전 목사에 대한 재판을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김해성 목사도 마찬가지다. 소속 교단인 기장 총회는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교단 차원의 사과는 없었다. 권오륜 총회장은 "기장 교단이 실망감을 끼친데 대해 똑같은 책임감을 느낀다"며 모호하게 넘어갔다. 관할 노회인 서울남노회는 김 목사의 사임 및 사직 청원을 수용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피해자인 A집사가 김 목사를 고소했지만, "김 목사 사임으로 고소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이 목사의 경우 관할 노회인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수도남노회가 임시노회를 열어 면직 및 무기한 수찬 정지 처분을 내린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10) NCCK 92년 사상 최초로 외국인 성직자 회장 선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한국정교회 조성암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를 제65회기 회장으로 선임했다. 비개신교 외국인 교단장이 NCCK 회장을 맡은 건 92년 역사상 처음이다. 이 같은 배경엔 NCCK가 회원자격을 ‘개신교 협의체가 아닌, 그리스도교 협의체'로 규정했기에 가능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1983년 아테네 대학교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조 대주교는 1998년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조 대주교는 이 해 12월 아테네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와 사목활동을 시작했고, 2008년 대주교로 선출됐다. 조 대주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조 대주교는 NCCK 총회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NCCK와 모든 교회들과 함께 협력해서 한국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서 협력해서 나아가려고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