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에 너무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은 말한다... 자주 불안해지는 사람들은 너무 많이 걱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곧바로 걱정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 느낌을 안다. 나도 역시 걱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밤잠을 설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내 앞에 많은 문제가 놓였을 때 세세한 일에 대해서도 과도한 주의를 기울이기는 한다. 걱정을 하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는 소모된다: 버럭 화를 낸다거나 아내나 아이에게 잔소리를 해대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걱정하게 되면 나의 관심은 온통 내게로 쏠리게 된다.
한 동안 나는 나의 걱정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만일 내가 예수께 더 집중했더라면 걱정을 멈추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만 더 생각했더라면 불안은 문젯거리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른 무엇보다 더 우선적으로 구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듯이)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에 대해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걱정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이 좋은 대처방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보다 왕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먼저다. 걱정의 근본적인 원인은 잘못된 우선순위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우리가 믿을 만한 하나님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줄어들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질 때 걱정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나의 생각이 왜곡되기 때문에 내가 걱정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생각을 고정할 때 나는 평안을 누린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일하지도 않고 돈을 벌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신다." 그런데 이렇게 비교하는 데에는 단순한 동물-인간의 비교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보다 얼마나 더 많이 돌보시는지 모른다. 여기에 복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들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분은 그들의 공덕과는 상관없이 복을 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우리도 보호하신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구원은 주님께 속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사랑의 아버지시다.
나는 우리의 구세주가 나나 당신과 같이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그분의 모든 것을 주셨다는 귀한 복음을 묵상할 때, 우리의 가치가 하나님 앞에서는 경제적인 상태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분이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십자가에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이시다. 이분이 기꺼이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사시다가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이 분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사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와 끝없는 교제를 다시 하도록 인도하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우리의 가치를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희생적 행위인 것이다.
요즘 같이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들은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과 진정한 정체성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격 없는 자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우리가 잊게 되면 불안과 걱정이 우리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으면 우리는 왕족이다. 우리의 큰형이 세상의 왕이시다.
당신은 왕에게로 나아갑니다,
많은 소원을 품에 안고서,
왜냐하면 그분의 은혜와 능력은 엄청나서
어떤 요청도 과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 뉴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