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천일이 넘었다. 올해 세월호 참사는 3주기를 맞이하지만, 세월호 침몰을 둘러싼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사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아래 세월호 특조위)가 꾸려지기는 했었다. 그러나 현 박근혜 정권은 이에 맞서 세월호 특조위를 무력화하는데 공을 들였다. 처음엔 세금도둑이라는 낙인을 찍더니, 2016년 6월30일이 활동종료시한이라는 유권해석을 들이대며 특조위 해산에 나섰다. 진상규명은 이대로 멀어지는 듯 보였다.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국정농단은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특히 그동안 금기시돼왔던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이 본격 재점화됐다. 이어 지난 21일 구속수감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세월호 참사에 따른 파장이 정권 책임론으로 번지지 않도록 대응전략을 주도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박종운 변호사는 세월호 특조위 상임위원으로서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 있었다. 세월호 참사 발생 천일을 맞아 박 변호사에게 그간의 과정을 들어 보았다.
-. 먼저 특조위에 참여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4년 4월 대한변호사협회(아래 대한변협) 세월호 태스크포스팀 시절부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에 관여를 해 왔으니, 벌써 1,000일이 넘었네요. 대한변협 세월호 특위 위원으로, 특히 특별법 제정팀장의 자격으로 피해자 단체의 입법청원안을 만드는데 관여하고 국회에서 특별법 제정 투쟁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대한변협 협회장께서 저를 세월호 특조위 상임위원으로 지명하신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세월호 참사 및 유가족들에 대한 정부·여당의 태도를 잘 아는 분들 모두 제가 세월호 특조위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세월호 특조위의 주요 임무는 ‘구조 실패에 대한 책임 소재'를 밝히는 것이 될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정부 부처는 물론이고 청와대까지 조사해야 하는데, 과연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 정권 하에서 성과를 낼 수 있겠느냐는 우려였었죠. 그래서 모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까지 제정된 마당에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가급적이면 사명감이 있는 분들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제 한 몸 헌신해야 하겠다는 각오로 세월호 특조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 세월호 특조위 상임위원으로서 그동안의 활동 내용을 되돌아본다면?
세월호 특조위는 참으로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2015년 1월 중순부터 정부·여당의 ‘세금도둑' 프레임에 갇혀 보수 언론의 집중 포화를 감당해야 했어요. 파견 공무원을 주요 보직에 앉히고 특조위 활동을 좌지우지하려는 정부 시행령에 맞서 광화문 광장에서 농성을 해야 했고요. 또 특조위가 신청한 예산의 2/3가 깎여나간 채 겨우겨우 별정직 공무원을 채용하고 예산을 운용하는 데까지 약 8개월이 걸렸습니다. 즉, 조사활동을 준비하는 데 8개월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별정직 공무원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한편 엄청난 분량의 수사·재판·감사 기록을 확보해 특조위 이전의 조사 결과를 정리했고, 그 성과를 2015년 12월 제1차 청문회를 통해 드러냈습니다. 2016년 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특조위 독자적인 조사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3월 제2차 청문회에서는 특조위 조사 결과를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 여러분께 알려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조사활동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려는 그 순간, 정부·여당이 세월호 특조위의 조사활동을 6월 30일에 종료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특조위는 큰 혼란과 고민에 빠지게 됐지요.
특조위, 세월호 특별법 정한 목적 달성에 최선 다해
원래 6월 제3차 청문회를 기획하고 있었지만, 정부·여당이 세월호 특조위의 조사활동을 정말로 6월30일에 종료시킨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번민의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끝내 정부는 6월30일에 일방적으로 세월호 특조위의 조사활동을 종료시키고야 말았습니다. 3개월 동안 종합보고서를 작성한다면 관련 예산을 주겠지만 조사활동을 계속한다면 예산을 줄 수 없다고 했어요. 7월부터 조사관들 급여는 물론이고 비용도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7월 27일부터는 이석태 위원장님을 필두로 광화문 단식 농성을 통해 이러한 정부·여당의 위법·부당한 조치를 널리 알렸고, 야당과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세월호 특조위는 10월 1일 해산되고야 말았습니다.
그 사이 예산도 없고 장소를 구하기도 힘들었고 정부 측 증인은 모조리 불출석했지만 제3차 청문회를 실행해 냈습니다. 그동안 특조위가 확보한 자료들을 모두 정리해서 서울시, 안산시, 국회 농해수위에 보내고, 국가기록원에도 보낼 준비를 다 했지요.
결과적으로 세월호 특조위는 조사활동을 시작한 지 약 10개월 여 만에 정부의 일방적인 조치에 의해 사실상 강제 해산되었고, 조사활동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범죄사실에만 집중했던 수사·재판기관이나 비위 사실에 집중했던 감사기관에 비하면, 세월호 참사의 직·간접적인 원인,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 안전사회건설을 위한 종합대책, 피해자지원점검 등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이 정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최선을 기울였습니다. 조사활동이 한창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성과가 하나 둘씩 나타나던 그 순간에 일방적으로 해산 당함으로써 임무를 마치지 못하게 됐지만 말입니다.
-. 특조위 활동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일 한 가지 씩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라면 먼저 외부적으로는 예상한 바 대로 정부·여당·보수 언론의 끊임없는 조사활동 방해, 지연, 거부, 회피였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여당 추천 위원들(이헌, 고영주, 조대환, 석동현, 차기환 - 글쓴이)과의 갈등, 파견 공무원과 별정직 공무원들 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고요.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처할 때마다 진상규명소위원장과 함께 위원장님을 보좌하여 나름 최선의 결정들을 해 나갔던 순간들입니다. 예를 들면, 정부가 6월30일에 조사활동을 종료시켰을 때, 어떤 분들은 7월 초에 일괄 사퇴 선언을 통해 결연한 의지를 보이자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런 방식으로 사퇴하고 특조위를 떠나는 것이야말로 정부·여당·보수언론이 원하는 것이고 그들을 기쁘게 하는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했습니다. 강제로 해산당하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단 하나의 진실이라도 더 밝혀내고 이미 밝혀낸 진실을 어떻게든 잘 보존하여 합법적인 방법으로 외부에 전달하거나 제2기 특조위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보았다는 말이지요. 그 결과 단식농성, 제3차 청문회, 특조위 자료 정리 및 이전 등 7월 이후의 각종 일정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