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 강동원이 함께 출연한 영화 <검사외전>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증거 앞에서 겸손해야지, 안 그래요?"
이 대사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고자 줄거리를 간략하게 적어야겠다. 주인공 변재욱 검사(황정민)는 살인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다. 옥살이에 적응하던 무렵 사기전과 10범의 한치원(강동원)이 수감된다. 그런데 한치원에게서 자신이 누명을 썼다는 단서를 발견한다. 그래서 변재욱은 자신의 법지식을 동원해 한치원을 감옥 밖으로 내보낸다.
자유의 몸이 된 한치원은 변재욱의 누명을 벗길 증거를 수집하고 다닌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변재욱의 상사였고, 지금은 정치입문을 노리는 우종길(이성민)이 변재욱에게 살인누명을 씌웠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변재욱은 재심 법정에 선다. 그리고 이 법정엔 우종길이 증인으로 불려나온다. 우종길은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다. 변재욱은 그의 주장을 깰 녹취록을 공개한다. 이 녹취록엔 우종길이 변재욱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고, 증거인멸까지 한 정황이 고스란히 녹음돼 있었다. 그럼에도 우종길은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다. 이때 변재욱은 강력한 한 문장을 우종길에게 내던진다.
"증거 앞에서 겸손해야지, 안 그래요?"
영화 자체는 그닥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변재욱이 던진 이 대사는 진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 현 시국을 보고 있노라면 이 대사는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온다.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공적 시스템의 무력화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의 눈과 귀는 온통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최순실 국정농단에 쏠려 있다. 탄핵심판을 심리중인 헌법재판소와 최순실 국정농단을 수사하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계속해서 뉴스거리를 쏟아낸다. 헌재와 특검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들은 지금이 21세기라고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이 나라 권력의 최상층부에서 벌어졌음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특히 비선실세 최순실은 국정을 농단하면서 이권은 꼼꼼하게 챙겼다. 최순실 일가가 40년 동안 박 대통령과 친분을 맺어오면서 축적한 재산만 3천 억 규모다. 이들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자 더욱 대담해졌다. 우리나라 국기인 태권도 도복에 오방낭 무늬를 새겨 넣으려 시도하는가 하면, 각종 법인들을 세워 13조가 투입되는 국가 이벤트인 평창 동계올림픽의 이권을 독차지 하려 했다.
그런데 사실 정치인의 부정부패는 한국정치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는 그간 있었던 부패 스캔들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적어도 이전 대통령들은 자신이 직접 나서 이권을 챙겼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사실 박 대통령이 최순실을 앞세워 자기 이권만 챙겼다면 일이 이토록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박 대통령이 국가의 모든 공적 조직을 무시하고, 공적 영역에서 자질을 검증 받지 않은 비선에게 국정의 민감한 부분까지 맡겼다는 데 있다. 만약 최순실의 보좌가 필요했다면 검증을 거쳐 필요한 공직을 줬어야 했다. 한편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없이는 최소한의 의사결정도 못하는, 금치산자나 다름 없다는 사실 말이다.
한때 최순실의 최측근이었던 고영태 전 더블루K 이사의 녹취록이 최근 공개됐다. 고 전 이사는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VIP(대통령)는 이 사람(최순실)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뭐 하나 결정도. 글씨 하나 연설문 토씨 하나 여기서 수정을 보고 새벽 늦게라도 다 오케이 하고."
그간 박 대통령은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으로 포장돼 왔다. 최순실 게이트는 이 같은 가면을 벗겨낸 셈이다. 국민들이 공분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흑색선전 난무하는 인터넷 공간
12월 중순부터 소위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이라는 간판을 건 친위집단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어 온라인 상에서는 특검 수사와 JTBC 등 언론 보도의 신뢰성에 흠집을 내는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양상이다. 특히 <미디어워치>, <노컷일베>, <뉴스타운> 따위의 극우 매체들이 인쇄물 300만부를 제작해 뿌린 일도 있었다. 이 같은 흑색선전이 그저 위기에 처한 박 대통령과 그 친위세력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라고 치부하면 오산이다.
기자가 12일 오후 천안역에서 직접 겪었던 일이다. 역 대합실에선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과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거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남성의 주장은 이랬다.
"박 대통령은 아무 죄 없다. 미르-K스포츠 재단에 재벌 돈을 끌어 온 건 국익을 위해서 아니었나? 최순실은 그저 심부름꾼일 뿐이다. 박 대통령 탄핵은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세력의 기획에 따른 결과다."
이 남성에게 "관련 정보를 어디서 얻었냐?"고 물었다. 이 남성은 ‘인터넷'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건 자유다. 그러나 그 역시 인간이다. 즉,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약한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준사법기관인 검찰과 특검은 그의 잘못을 낱낱이 입증하는 중이다. 특히 검찰은 ‘최순실과 박 대통령이 공모관계에 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는 꽤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적어도 이쯤되면, 증거 앞에 겸허해져야 한다. 드러난 증거를 조작이라 우기고 국가기관의 수사결과에 흠집을 내는 행위는 사실 중대 범죄행위다. 도대체 어떤 개인이나 세력이 이 같은 행위를 자행하는지 반드시 밝혀내야 할 일이다. 또 저의가 의심스런 흑색선전을 합리적 검증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결국 본인이 무지하다는 걸 드러낼 뿐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같은 행위가 집단적으로 벌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심각한 퇴행으로 치닫을 뿐이다.
사실 이 같은 퇴행은 박 대통령이 부추긴 측면이 강하다. 박 대통령은 ‘피 눈물' 운운하며 탄핵소추안에 불쾌감을 드러낸 한편, 친위세력을 조직해 국면전환을 노렸으니 말이다. 이런 식의 대응은 결국 자해행위라는 걸 왜 모를까?
박 대통령, 그리고 그를 지지하다 못해 숭배하는 친위세력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부디 증거 앞에 겸손하기 바란다. 그게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고, 이 사회에 작게나마 기여하는 일이다. 다시 한 번 간곡히 바란다.
증거 앞에 겸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