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0년이 되었다. 새해가 밝았다. 입춘(立春)이 지났다. 한없는 사랑을 주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죽음을 만나고 사랑하는 이의 임종을 지켜드리자고 그토록 다짐했건만. 사랑에 게으른 난,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장례 기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눈물을 흘린다. 뒤늦은 후회와 말뿐인 사랑에 대한 무책임함에 대한 죄의식으로. 결국, 끝까지 내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이기심을 탓하며 슬픔에 젖어있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슬퍼함은 이별에 대한 슬픔과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잊히는 망각의 중력 때문이리라.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다시 보았다. 죽음을 닮은 밤. 그 밤을 찬란한 인생으로 맞이한 고흐의 해석이 그리웠나 보다.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생레미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작품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을 무렵이다. 고흐는 밤을 사랑했다. 엄중한 생의 현실인 죽음과 상실, 이별을 사랑했다. 모두가 낮의 찬가를 부를 때 고흐는 밤의 찬가를 불렀다. 밤을 거부하고 영원한 낮을 갈망하는 욕망의 세태를 거절하고 죽음을 생의 현실로 맞이한 고흐의 정신이 느껴진다.
고흐가 바라본 땅의 현실은 정적이다. 삶이라는 현실의 중력 앞에 죽음을 상상할 틈도 없이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죽음을 노래하며 마땅히 살아가야할 사람됨의 삶을 가르쳐야할 교회당에 불은 꺼져있다. 그저,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물어야 하는 고흐의 고독함이 전해진다. 반면, 밤의 현실은 동적이다. 황홀하다. 절제된 찬란함으로 서로의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밤하늘. 역동적이며 굽이치는 붓놀림. 하늘과 땅을 잇는 사이프러스 나무. 고흐는 그렇게 밤의 찬가를 부르며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과연, 죽음은 끝일까? 죽음은 부정한 것일까? 죽음을 그리워하며 스스로 생을 포기한 이들의 선택은 잘못된 것일까? 얼마나 참지 못할 고통이었으면 스스로 생을 포기할까? 신이 있다면 그들의 죽음을 심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에 애통해 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 쌓일수록, 육체의 쇠함과 질병의 고통이 잦아질수록 죽음에 대한 답 내리기를 멈추고 침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 온다. 누군가는 이 땅으로의 부름을 받아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다. 어떤 이는 육신의 장막을 벗고 새로운 존재와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생명과 죽음은 새로운 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슬퍼하자. 그러나 절망하진 말자. 울자. 그러나 우울의 노예가 되진 말자. 이 땅의 삶을 마치며 죽어간 이들이 전해준 삶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자. 빛과 어둠, 얻음과 상실, 만남과 이별의 교차 속에 빼꼼이 고개를 내미는 인생의 본질을 부여잡고 한 번 뿐인 인생, 참사람답게 살아보자. 그것이 못다 이룬 사랑에 대한 예의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