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 짐베르크의 '상처 입은 천사'
무한 경쟁이란 단어가 살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루, 하루 불안과 위기에 쫓기며 노동의 노예로 살아간다.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열정의 끝가지에 공허와 허무가 사무친다. 헛헛한 영혼의 빈자리엔 쾌락과 소비, 짤막한 욕망의 쾌감이 자리한다. 자신에게 묻는다. '삶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살기 위해 살아가지만 살아있지 않은 자신을 숨긴 채 오늘도 살아간다.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며 살기 위해 약해지지 말라고 배웠다.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잃어버린 종교에게 성공과 성취, 번영이 신의 축복이라 들어왔다. 삶이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그 모든 것이 허상이며 삶의 본질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나를 구속하는 생존의 현실과 돈이 있어야만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을 얻을 수 있는 자본의 구조에 매여 있다.
이상과 현실, 앎과 삶의 불일치가 주는 내적 갈등이 쌓일수록 존재의 호흡은 거칠어진다. 자기 소외 속에 점점 '나'를 잃어간다. 나를 잃은 채 살아가는 '나.' 그 자체가 이미 상처다. 아프면 안 된다. 끝까지 버텨야 한다. 스스로에게 다그치지만 갈수록 지쳐만 간다.
'상처 입은 천사,' 핀란드의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 유고 짐베르크의 그림이다. 핀란드의 민담 '아마란스'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의도된 메시지보다 해석자의 상상과 감정이입으로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 내려했던 작가의 의도가 통했나보다. 눈과 마음이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거닐며 다양한 감정과 이성의 활동을 촉발시킨다.
유독, 상처 입은 천사의 모습이 눈에 담긴다. 중앙에 위치한 탓일까? 새하얀 존재의 빛깔 때문일까? 피를 흘리며 찢긴 천사의 날개, 상처 입은 두 눈을 동여맨 붕대, 그럼에도 천사는 자신의 정체성과 생명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듯 시든 꽃을 꼭 붙들고 있다. 천사를 짊어지고 가는 두 아이의 표정은 어둡다. 앞에 선 아이는 장례식을 가는 듯 무표정한 얼굴에 검은 정장을 입고 있다. 후미에 자리한 아이의 표정은 살벌하기까지 하다. 말하지 않지만 눈빛으로 무엇을 따지는 듯하다. 아이의 눈빛이 마음에 물음을 던진다. '아이는 무엇 때문에 저리도 분노하고 있을까?'
아이에게 다시 말을 걸어본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니?' 마음에 한 줄기 소리가 들린다. '천사는 아프면 안 되나요?' 천사는 아프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고정관념에 저항하는 아이의 외침이 들린다. 그렇게 소리 없이 죽어가는 영혼들. 아플 수도 없고, 아파서도 안 된다며 상처와 아픔, 고통을 억누르는 이들의 슬픔을 아이가 대변하고 있다.
아픔에 솔직할 순 없을까? 자기 생명에 집착하지 않으며 건강하게 자신을 돌보는 길은 무엇일까? 살아있기에 아프다. 사랑했기에 상처 받는다. 아니라고 말하지 말자. 미성숙한 자기애라 말하지 말자. 행복하지 않은 이가 누굴 행복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서로의 아픔에 솔직하고 서로의 아픔을 단죄하지 않으며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포용할 순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