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3월31일(금) 뇌물죄의 몸통으로 지목되어 구치소에 수감됐다.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구속된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영(榮)이 욕(辱)으로 종결된 일로 본다면 인간사의 우울한 속성이 도드라질 것이고, 정의의 승리로 간주한다면 새로운 희망을 염원하게 할 것이다. 마침 봄비가 내렸는데, 이 봄비가 우울의 계곡에는 무거운 침묵으로, 희망의 들판에는 새 순의 생명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이 구속사건도 해석자에게 관점에 따라 다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사실 우울하기도 하고 희망찬 일이기도 하니 어느 한쪽의 생각만이 일방적으로 옳을 수가 없다. 다만, 해석자는 우울한 요소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변화를 다짐하는 계기로 삼는 선택을 결행할 필요 앞에 서있을 따름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선, 이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생명이든지 나의 생명과 동일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철저히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내 생명이 귀하면 남의 생명도 귀하다는 생각은 의식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생각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보의 차원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 타인의 생명의 위기에 대해 무신경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기울어진 세월호의 선체 안에서 승객들이 공포에 질려 1초가 다급했을 때 박 전 대통령은 7시간 동안 본인만 아는 일들을 하느라 바빴다. 그는 참척의 한을 품은 부모들을 같은 아픔으로 품지 않았다. 게다가 3년간 세월호 인양을 지체시킴으로써 진실을 수장시키려고 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을 고의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공포는 무시'된' 것이고 그녀가 아픔을 품지 '못했으며' 세월호도 물밑에 '내버려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모습은 그녀에게 그만큼 생명의 가치가 의식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둘째, 잘못은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가리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 잘못을 가렸을 때 그 잘못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개발하는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을 생각하면, 애초에 잘못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더 큰 화를 예방하는 길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이 왜 살인교사로 이어졌고 결국 충신이 살해되며 다윗 집안에 저주가 내려지도록 비화되었는가? 박 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해 13가지의 기소사유가 제기되었을 때 처음부터 자기보호논리의 색안경을 끼고서 그 색안경에 포착되는 요소에만 집중했다. 그녀의 태도는 잘못을 지적한 국민을 깡그리 무시할 뿐만 아니라 사태의 핵심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듯이 해석되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보호논리의 색안경을 벗으면 죽을 것 같아서 두려웠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색안경 너머에도 소중한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았어야 했다. 잘못을 적극적으로 인정할 때 그 아픔을 공감하며 함께 기꺼이 그 해결책을 모색해줄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이다.
셋째,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해서는 안 된다. 여기 신접한 자들은 소위 그녀의 책사라 불리는 자들로서 맘몬과 권력의 신과 소통하는 귀재들을 일컫는다. 그 신접한 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면, 맘몬과 권력의 논리에 따라 반 생명적 결정을 하게 되고 권력의 자기증식 체계를 구축하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세계화된 자본의 논리에 따라 '흙수저'들의 비명보다 재벌들의 호소에 먼저 귀를 기울였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흙수저'들을 구원할 길을 모색하려는 방책이었지만, 그 과정에 사익을 위해 국정을 농단하는 무리들과 선의의 '영혼 없는' 공무원들을 요직에 중용하여 권력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면 특정집단의 금력 및 권력부식을 위한 조언과 정책제안을 분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사울왕을 죽이신 이유도 결국 그가 국가를 운영할 때 명징한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역대상10:13-14).
불행을 당한 한 인간을 세워 두고 이처럼 그 행적에서 드러난 그늘을 분석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계기나 기준이 없으면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기가 어려운 존재인지라, 우리는 이 같은 불행을 나의 삶의 경험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나의 그늘 아래서 추위에 떨고 있을 무명의 존재들을 구원하는 길이기도 하며 나의 그늘 자체를 각성하게 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는데,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된 존재로서 다른 존재의 생명의 가치를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가? 나는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는데, 나의 잘못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합리화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약속받았는데, 하나님의 가르침보다 지상에서 신처럼 보이는 자들의 귀재에 먼저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가? 창밖에 봄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우울의 계곡이 씻겨져 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