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광복과 조선신학교 교장 취임

<만우 송창근 바로보기 15>

피고인들이 보석인 상태로 진행되고 있던 수양동우회 사건이 드디어 마지막 막을 내린 것은 1941년 7월 21일이었다. 그 날 고등법원 형사부의 최종심에 의하여 ‘피고인 전원 무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사건의 시작부터 조선총독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한 고도의 정략에서 비롯되었고, 결말 역시 정략 차원에서 마무리된 것이다.

제2심에서 ‘징역2년’을 선고 받았던 송창근 목사는 이때 다소 착각을 일으켰던 것 같다. 최종심에서 피고인 전원 무죄의 판결이 내려진 것을 두고 일본제국의 국가적 차원에서 실행된 간교한 정략적 쇼였다고 생각하는 대신, 오히려 일본제국의 사법제도에 대한 일말의 신뢰가 생겼던 것 같다. 그런 신뢰의 형적은 그가 이 시점에서 신학교 경영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송창근은 수양동우회 사건이 마무리 되자 곧 조선인에 의한 신학교 건설 작업을 제대로 추진하려고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보석 중인 피고인 신분’이라 해서 활동을 제지 당했지만 이제는 최종심의 무죄 판결로 인하여 그러한 핸디캡이 아주 사라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진지한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남도 그런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의 송창근이 바로 그러했다.

그는 제약이 심하고 억눌린 신학교육을 펼쳤던 외국 선교사들이 가고 없는 이 땅에 새로운 비전과 기상의 신학교육을 펼칠 제대로 된 신학교를 세우고 싶어서 조바심을 냈다. 그런데 학교 인가가 문제였다. 1940년 봄에 김대현 장로의 기부금으로 시작한 조선신학교는 끝내 ‘학교’로서의 설립 허가를 받지 못하고 기껏 1년 주기로 해마다 새로 허가를 받아야 하는 강습소로 허가를 받았다. 그래서 ‘학원’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서 ‘조선신학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승동교회 아래층을 빌려 문을 열고 있는 상태였다.

학교가 아닌 1년짜리 강습소 허가를 가지고서는 제대로 된 신학교 교육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총독부 당국은 기독교에 관계된 것에는 일체 냉혹하게 굴었다. 더 이상 기독교 신학교육을 위한 신학교 허가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송창근은 이미 ‘학교’로서의 인가를 받아가지고 있는 ‘신학교’로 눈을 돌렸다. 당시 서울에는 성결교에서 경영하는 경성신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떠나고 선교비 지원이 끊어지자 학교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결과, 새로운 경영자를 찾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본 결과 성결교회의 중진들도 송창근 목사를 신학교 운영자로 모시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에 크게 찬성했다. 그는 경성신학교를 맡아서 이상적인 신학교육기관으로서 크게 육성하고 운영할 계획을 세웠다. 젊은 사업가 몇 사람이 헌신적으로 자금을 대기로 약속하고 나섰다.

의욕에 부푼 송창근은 1941년 가을에 일단 ‘부목사’라는 칭호로 직제자인 정대위 목사를 김천 황금정교회에다 데려다 놓았다. 자신이 곧 서울에 가서 경성신학교 교장을 하게 될 것을 대비하여 자신의 빈 자리를 채울 목회자로 정대위 목사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어떠한 곳인가. 송창근이 교장으로 취임할 허가를 끝내 내주지 않았다. 결국 송창근은 ‘자유인’이 된 1941년이 저물어갈 무렵에 일제 당국의 본색을 확실하고 선명하게 알아보았다. 일제가 물러가기 전에는 송창근이 경영하는 신학교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계획을 포기했다. 그것은 정말로 영혼까지 아프게 하는 괴롭고 쓰라린 상처였다. 경성신학교는 결국 문을 닫았고, 학교 건물은 일제 경찰이 자기들의 교육기관으로 사용했다.

송창근은 아픈 마음을 안고 다시 김천 황금정교회의 목회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왕 온 것이고 또 그간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있었기에 역시 ‘부목사’는 필요했다. 정대위 목사는 부목사로 눌러앉아서 송창근 목사와 같이 황금정교회의 목회에 동역했다.

좌절된 ‘신학교’에 대한 꿈으로 인한 쓰라린 상처를 제외하면 김천에서의 목회는 행복했다. 정말로 열심히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복된 나날이었다. 송창근과 그의 제자들은 열심히 목회에 전념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소화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이 되었다. 김천에서 해방의 소식을 들은 송창근 목사는 그 날로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 조선신학원은 개교한 지 6년째였다. 그간 학원장이 세 차례나 바뀌었다. 1940년 4월에 제1대 학원장으로 취임한 김대현 장로가 9월에 별세하여, 제2대 학원장으로 윤인구 목사가 취임했다. 1943년에 윤인구 목사가 떠난 뒤에는 제3대 학원장으로 김재준 목사가 취임했다.

그간 신학원은 자체 소유 건물이 없는 채로 이리저리 떠돌며 지냈다. 처음에는 승동교회 1층을 빌어서 교육을 시작했고, 정동의 일본인 교회의 건물을 빌어서 쓰기도 했으며, 덕수교회 건물을 빌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해방과 더불어 즉각 조선신학원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었다. 우선 9월의 가을 학기 개강에 맞추어 교수진을 대폭 충원했고, 피난민 학생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사회에서는 신약과 목회신학 교수로 송창근, 영어와 실천신학 교수로 최윤관, 교회사 담당으로는 공덕귀를 전임강사로 발령했다.

가을 학기 동안에 이사회에서는 다음 학기부터 신학원을 이끌고 갈 제4대 원장을 새로 뽑았다. 원장 후보는 제3대 원장인 김재준 목사와 송창근 목사 두 사람, 이사회에서 논의 끝에 투표에 부쳐서 송창근 목사가 제4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신학교 교장 시절 송창근 목사(가운데)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송창근은 1946년 3월부터 제4대 원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원장으로 취임한 즉시 미군정의 문교부와 교섭하여 조선신학원을 학사, 석사, 박사의 학위를 줄 수 있는 정규대학과정의 교육기관으로 승격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7월에 드디어 인가를 받아 내었다. 단지 다른 신학교와의 관계상 학교 이름은 ‘조선신학교’로 하는 조건이어다. 이로써 조선신학교 남한 유일의 대학과정 신학교가 되었다.
1947년 7월에 대학과정인 ‘조선신학교’로서 문교부 인가가 나오자, 이사회에서는 즉시 조선신학교 제1대 교장으로 송창근을 선임했다. 이리하여 당시 전국의 신학교 중에서 최초로 학위를 줄 수 있는 대학과정의 신학교가 된 것이다. 그래서 10월에 대학인가를 기념하는 큰 잔치를 베풀었다.

하지만 이때 조선신학교 경영은 대단히 어려웠다. 당시 이 신학교가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유일한 교단 신학교였다. 그리고 이제는 해방이 된 때이지만 미국 장로교 선교부로부터나 교단으로부터도 원조가 없었다. 다만 캐나다 연합 교회가 약간의 원조를 했을 뿐이었다. 교수진에는 송창근 박사를 비롯해 조직신학의 김재준 교수, 신약의 조선출 교수, 영어와 영신학 독습의 최윤관 교수, 실천신학의 한경직 교수, 그리고 교회사의 서고도(Scott) 교수들이 전임교수였다. 그리고 강사로서는 신약의 지동식 교수, 구약의 프레이저(Fraser) 캐나다 선교사, 종교학의 최거덕 목사, 기독교 교육의 로스(Ross) 캐나다 선교사 등이 있었다. 송창근 목사는 부족한 학교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조향록 목사는 다음과 같이 그 모습을 술회했다.

“초동교회 장로이던 정훈 장로가 함북 경원 분인데, 명동에서 큰 신식 약방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그 곳에 자주 갔는데, 거기서 송 박사를 자주 만났다. 월급 때가 되면 신학교 운영자금을 마련하러 오신 것이었다. 약방에서 나가실 때문, ‘또 어디 가서 비럭질을 해야 하겠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가 하면 미군의 구제물품 담당자와 사적으로 교섭하여 새벽에 구제물품 창고에 가서 구제물품을 얻어다가 팔아서 신학교 운영자금으로 쓰기도 하고 직원들과 신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 일이 조선출 목사의 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천리교 재산을 접수하여 동자동에는 남자 조선신학교를, 영락동에는 여자 조선신학교를 경영하다가 다시 두 신학교를 합쳐서 조선신학교 남자부와 여자부가 되고 송창근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통합 후에 송창근 교장의 명에 의하여 여자부가 있는 영락동에 이삿짐을 풀게 되었다. 와 보니 한경직 목사가 여자부 부장 겸 영락교회 목사로 계셨고 공덕귀 선생이 여자부 교수 겸 사감이었다. 나는 살기는 여자부에서 살았지만 주로 동자동에 가서 가르치는 일과 살림을 맡아, 말하자면 송창근 교장의 비서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의 서울 생활이 자리를 잡게 된 셈이다.
 

조선신학교 제1대 교장 취임식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그러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고생길이었다. 많은 고생 중에도 제일 이려운 것은 경제 문제였다. 명색이 학교인데 운영비가 있어야지, 학생들은 많이 모여들었지만 학비가 있어야지. 교수들의 생활비가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바는 마침 어디서 화물자동차 하나를 구해가지고 미군 구제물품 창고에서 구제물품 보따리를 얻어 해결하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창고가 북창동 시경 자리였는데 그곳 총책임자가 천주교 신부였다. 송 목사님의 지시대로 전날 밤에 신부에게 닭 두어 마리를 갖다 주고 다음날 아침 만날 시간을 저하고 오는 것이었다. 나는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니까 무관하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교장이란 양반이 새벽 미명에 창고에 나와서 신부와 악수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눈시울이 뜨거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주로 새벽에 이뤄졌기 때문 그 고충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이러한 경제적 고충 속에서도 조선신학교는 점점 체계가 잡혀가면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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