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선 부모가 일터로 나간 사이 부모를 대신해 가사일과 동생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 학교에선 피부색이 다르고, 한국어 발음이 어눌하다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한다. 또 다른 친구들이 잘만 챙겨오는 변변한 학용품도 못 챙겨갈 때면 아예 학교에 가기가 싫다. 그래서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야 할 시간에 부모가 일하는 공장 주변을 배회할 때도 많다.
파키스탄 등 후진국에서 온 이주민 노동자들의 취학 연령대 아이들의 일상이다. 특히 부모들이 불법체류자일 경우 아동들은 교육 받을 기회마저 잃기 십상이다.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통계에 의하면 2008년 3월 기준 16세 미만 체류 외국인은 3만 8466명에 달하며, 이중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 아동 약 1만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2-3만 여명의 외국인 아동·청소년들은 대부분 불법체류자 신분 상태에 있다. 때문에 학교에 제대로 못 다니고, 병원 치료도 잘 받지 못한다.
'모든 어린이가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존중되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은 1957년에 제정된 우리나라 어린이헌장의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어린이헌장은 이주민 노동자 자녀들에겐 예외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는 사실 1991년. 그에 앞서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UN아동권리협약(1989년)에 참여했다. 당시 UN아동권리협약에 따르면 아동의 생존, 보호, 발달, 참여의 권리 등 어린이의 인권과 관련된 제반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 20일 오후 서울 YWCA 4층 강당에서 '이주 아동·청소년 권리보장을 위한 시민행동' 발족식 및 토론회가 열렸다 ⓒ김진한 기자 |
하지만 이주 노동자 권익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전문가들은 190여 개국이 비준해 국제법적 효력을 갖고 있는 이 협약에 참여한 한국이 당사국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20일 서울 YWCA 4층 강당에서 발족식을 가진 '이주 아동·청소년 권리보장을 위한 시민행동'은 창립 취지문에서 “'모든 아동·청소년들이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며 생활하고자 하는 이상과 오늘 한국의 현실은 먼 거리에 있다”며 “많은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이 학교에도 가지 못하거나 성장기의 아동·청소년으로서 가져야 할 학습과 놀이, 친구 사귀기의 기회와 의료서비스와 제반 사회복지 서비스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현 이주민 노동자 아동·청소년의 실상을 고발했다.
이 단체는 또 “외국인 노동자를 부모로 둔 대부분의 이주 아동·청소년들은 부모의 체류 신분과 관계없이 미등록 불법 체류 상태”라며 “이런 이유로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들은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거나 병원에서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등 아동·청소년으로서 누려야 할 교육, 복지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방치되고 있다”고 했다.
“아동·청소년들이 부모의 신분이나 체류 상태에 관계없이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한 이 단체는 “UN아동권리협약이 정한 아동의 권리가 실현되는 법적·사회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 단체는 향후 이주아동권리보장법(가칭)의 입법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으며 그밖에도 이주 아동·청소년들이 겪는 사회적 차별의 시정과 기회 제공을 위한 시민사회의 참여를 조직화하는 일과 여론 조성을 위한 활동 등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 단체에는 현재 이주민 아동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사)세계선린회(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사)지구촌사랑나눔, 서울 YWCA, 서울 YMCA, 한국외국인지원단체협의회, 흥사단 등이 참여하고 있다.
발족식에 이어 활동의 내용을 세분화할 목적으로 진행된 토론회에는 설동훈 교수(전북대 사회학과), 김성천 교수(중앙대 아동복지학과) 등이 참석해 각각 '이주 아동 인권의 국제적 동향과 한국의 현실' '이주 아동·청소년의 인권보장을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과 과제' 등을 주제로 발표했다.
설동훈 교수는 “아이들의(이주 아동들의) 모습은 '우리'와 겉모습이 다르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용인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의 반영”이라며 “사회 전반에 녹아 있는 차별의 분위기를 철폐하지 않고서는 근본적 치유가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각종 차별과 편견 및 고정관념을 없애기 위한 사회 전체적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 설 교수는 “앞으로 한국사회가 감당해야 할 다문화 사회의 도전을 고려해 다문화·다인종·다민족과 관련된 교육 방안이 교육 행정과 현장에서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천 교수도 ▲ 체류할 수 있는 권리 ▲ 사회복지의 권리 ▲ 차별받지 않을 권리 ▲ 부모와 살 권리 ▲ 보호받을 권리 ▲ 교육받을 권리 등 각 영역에서 꾸준한 노력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각계 활동가들은 이주 아동들의 열악한 교육 그리고 의료 복지 실태 등에 우려를 표하고, 이주아동권리보장법(가칭) 입법 운동을 벌여 이주 아동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 힘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