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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닫는 사람

2017년 7월 16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채수일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55:10-11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로마서 8:18-23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서 13:18-23

"너희는 이제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무슨 뜻을 지녔는지를 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가에 뿌린 씨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돌짝밭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하고,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또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 사람이야말로 열매를 맺되,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낸다."

설교문

chaesuil
(Photo : ⓒ베리타스 DB)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

1. 마태복음 13장 34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비유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비유는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취하신 대화와 소통 형식이면서, 예수님의 역사적인 가르침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에는 35개의 비유들이 전해내려 오는데, 그 가운데 23개의 비유들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그 진정성이 인정되는 것들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특정한 사정을 선명하게 표출시키고, 누구든지 비유를 듣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비유는 청중을 그들의 매우 일상적이고 익숙한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에, 단순하고 명백해서 어린이들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원래의 상황과 유리되어 비유 이야기 자체만 전해지면서, 여러 형태의 해석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이른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도 초대교회의 해석이 후에 덧붙여진 전형적인 비유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의 본래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비유의 가장 오래된 전승 층과 후대의 전승 층 사이를 가르는 힘든 작업을 통해 역사적인 핵심에 접근해야 합니다.

2. 그렇다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본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비유의 원형은 도마복음 9장에 실려 있는데, 도마복음은 어떤 해석도 덧붙이지 않은 채 전승하고 있습니다. 도마복음은 단순히 '예수가 말했다. 보라, 씨 뿌리는 자가 나갔다. 그는 씨앗을 그의 손에 가득 채웠고 뿌렸다. 어떤 것들은 길 위에 떨어졌다. 새들이 와서 그것들을 쪼아 먹었다. 어떤 것들은 바위 위에 떨어졌다. 그것들은 땅 속에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고 하늘을 향하여 이삭들을 내지 못하였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가운데 떨어졌다. 가시덤불들이 씨들을 질식시켰고, 벌레가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졌다. 그것은 좋은 열매를 내었다. 그것은 60배, 100배, 200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는 '씨'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으로, 길가는 악한 사람의 시험, 돌짝밭은 환난이나 박해, 가시덤불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좋은 땅은 말씀의 뜻을 깨닫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우리는 오랫동안 이런 해석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알레고리칼한 해석은 지금까지도 보수적인 성서해석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엄밀하게 말해 생활률적 권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거나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거나, 박해를 받아도 말씀 위에 굳건하게 서야 한다거나, 세상의 근심과 걱정,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말씀에 대한 순종에 장애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개인 윤리적 권고 이상의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 비유를 스스로 해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늘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마태 13,19)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하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밝히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 다음에 등장하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도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좋은 씨를 뿌렸어도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리고 갈 수 있고, 같은 밭에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하늘나라에도 건강하고 맛있는 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있다는 것이지요. 같은 밭에 씨를 뿌려도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고, 돌짝밭에 떨어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지지만, 또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하늘나라도 좋은 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돌짝밭도 가시덤불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는, 지상에 실현된 하늘나라라는 교회에는 오직 선한 것만 있고, 기쁨과 행복만 있다고 생각하는 통념에 반대되는 진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비유를 뒤따르는 비유,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온갖 고기들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먹을 수 있는 물고기만이 아니라, 먹을 수 없는 물고기들도 같은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것처럼(마태 13, 47), 하늘나라에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지요. 곳간 안에는 새 것도 있고 낡은 것도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에도 새 것과 낡은 것, 진보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이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마태 13,52). 하늘나라에는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답고, 맑고, 밝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추하며, 혼탁하고, 어두운 것들도 함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교회, 교인들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 순전하고 아름다운 밀만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자란다는 것, 돌짝밭도 가시덤불도 좋은 땅과 같이 있다는 것에 그리스도인은 놀라거나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에게 어느 날 노년의 한 여성이 찾아와 조심스럽게 물었다고 합니다:

'바르트 교수님, 제가 하늘나라에 가면, 보고 싶은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그런데, 아마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보게 될지 모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나라가 아닐지 모릅니다. 하늘나라가 우리의 모든 통념을 깨는 낯설고 놀라운 새로운 세계임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 나라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그 나라에 초대하시는 분도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 '씨 뿌리는 사람 비유'의 또 다른 비밀,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비록 경험적으로 실패한다고 해도, 돌짝밭에 뿌려진 씨, 길가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처럼, 가라지와 함께 있는 씨처럼 실패한다고 해도, 그것의 종말적 성공은 30배, 60배, 100배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경험과 예상을 넘어선, 비교가 불가능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결과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비유'의 요점은 실패와 성공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결국 성공이 실패를 압도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둔다면, 길가나 돌짝밭,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져 못쓰게 된 씨앗들은 손실이라고 보기에도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손실에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된 하늘나라의 결과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추어진 보물과 귀한 진주를 구하기 위하여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는' 농부와 상인처럼 모든 것을 팔아서 그것을 사는 것입니다(마태 13,44-46). 하늘나라,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보이지 않지만 공중의 새들이 모두 깃들이는 큰 나무 같은 나라, 처음에는 아주 적은 양이지만 큰 빵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나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나라, 그 나라가 하늘나라 아니겠습니까! 그런 나라는 우리가 가진 것을 조금만 팔아도 얻을 수 있는 보물이 아니라,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사야할 만큼 가치 있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새로운 세계를 한 번 본 사람은 옛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걸만한 목적을 찾은 사람은 한 눈 팔 사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4. 종교사적으로 13세기는 신비주의의 전성기였습니다. 이 시기 유럽은 중세 후기의 봉건사회가 붕괴되었고, 교황청과 국가권력과의 힘겨운 투쟁이 결국 두 집단을 모두 허약하게 했습니다. 이런 외적인 어려움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단들, 소종파들, 마녀사냥과 교회의 부정부패는 교회의 붕괴에 기여하였습니다. 교회의 개혁이 시급하게 요청되던 바로 이 시기에 신비주의 운동도 전성기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바로 이 시기에 아시시의 프란치스꼬(1182-1226),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트힐트(Mechthild von Magdeburg, 1208-1282/1297), 하인리히 조이세(Heinrich Seuse, 1295-1366), 마이스터 에케하르트(Meister Eckehardt, 1260?-1327/1329 사망), 요한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 등 혜성 같은 인물들이 출현했습니다.

이슬람 세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몽골의 침략과 그로 인한 재난으로 세상은 파멸 직전에 있었습니다. 이른바 후기 수피주의 시대라 불리는 13세기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이 출현했는데, 스페인 태생의 이븐 알-아라비(Ibn al-Arabi, 1165-1240), 그리고 그보다 약 반세기 뒤에 활약한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젤랄렛딘 루미(Maulana Dschelaleddin Rumi, 1207-1273)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UN 유네스코가 루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을 '세계 루미의 해'로 선포하기 전까지 루미는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루미는 제자 후사무딘 첼레비(1284년 사망)의 요청으로 26.000 소절에 달하는 신비적이고 교훈적인 이행시 '마스나비'(Mathnawi) 외에도 3만 6천 소절에 이르는 서정시, 아랍어로 된 설교와 서간을 모아 엮은 산문집 '피히 마 피히'를 남겼습니다. '마스나비'는 신앙인이 일상에도 존재하는 초월적 차원을 깨닫고, 그 안에 숨겨진 실재를 통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내면에 거하는 신비적 실재를 보지 못하는 원인이 자기중심적 사고에 있으며, 자신이 분리된 존재임을 깨달으면 모든 존재의 근원과 재결합 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세계의 일부가 어찌 세계를 떠날 수 있으랴?

어떻게 습기가 물을 떠날 수 있으랴?

불을 던져서

불을 끄려고 하지 말아라.

피로 상처를 씻지 말아라.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그림자를 따돌릴 수 없으려니와

때로는 그림자가 앞장을 서기도 한다!

오직 머리 위 둥근 해만이

네 그늘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바로 그 어두운 그늘이 너를 섬기느니!

너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너에게 복을 준다.

어둠이 너의 촛불이요

울타리는 너의 진보(進步)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불로 불을 끄고, 피로 상처를 씻으려 합니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는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는 곳에 빛이 있는 법,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는 오직 빛과 내가 수직일 때입니다. 스스로의 자유에 울타리를 칠 때, 진정한 자유의 진보를 실현할 수 있고, 상처가 오히려 복이 된다는 역설은 오직 경험한 사람, 새로운 세계를 본 사람만이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한테 입 맞추고 싶다 할 때,

당신은 말했지요.

키스의 댓가는 그대 목숨이라고.

아, 내 가슴이 소리치며 달려갑니다.

얼마나 신나는 흥정이냐? 어서 바꾸자!'

목숨을 주고 바꿔도 아깝지 않은 흥정,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농부, 좋은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그런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팔아야 소유할 수 있는 것이지, 반쪽 마음 가지고서는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 그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대 진정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사랑에 걸어라.

아니거든, 이 무리를

떠나라.

반쪽 마음 가지고는

어전(御前)에 들지 못한다.

신(神)을 찾겠다고 나선 몸이

언제까지 지저분한 주막(酒幕)에 머물러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참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반쪽 마음 가지고서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역사의 심판이 아니라 역사의 진보와 동일시되고, 신앙이 한 인간의 전인격적인 결단이 아니라 교양과 동일시되며, 하나님의 집이 노닥거리는 주막과 동일시되는 곳이야말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마음이 무디어진 백성이 모인 곳, 아니고 어디겠습니까!(마태 13,14-15).

5. 지금 세계는 '영성'(Spirituality)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문명사적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영성'의 라틴어 뿌리인 동사 'spirare'는 '숨 쉬다'는 뜻입니다. 그에 상응하는 형용사 'spiritualis'는 '숨 쉬는 것에 속하는, 또는 공기에 속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성'이라는 단어집단이 우리의 '숨', 우리의 '몸', 우리의 '생명'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영성은 우리 몸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고, 공기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없으면, 숨 쉬지 않으면, 우리 몸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영성이라는 단어는 세계와 타자의 현실로부터의 도피와 회피라는 부정적 의미에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성은 '한 주어진 순간의 강렬한 신비 경험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의 긴 과정, 혹은 삶의 방식' 입니다. 영성은 순간적 체험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긴 삶의 과정에서 우리의 일상적 삶과 함께 성숙하는 신앙과 관계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영성은 본질적으로 상호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실천적입니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또 다른 인물이 있는데,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선생이 그 분입니다. 다석 유영모는 그의 '다석 일기'와 독특한 우리말 경전해석, 그리고 일일일식의 기행, 함석헌 선생의 선생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어렵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러나 미처 그 뜻을 곱씹어 생각하지 못했던 순수한 우리의 일상 언어로 풀어낸다는 데 있습니다.

'은혜'를 '힘입어'로, '시간'을 '덛'으로 풀어내는 것이나,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내 '얼굴'을 '얼이 든 골짜구니' 등이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깨달음'에 대한 그의 통찰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깨닫는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한 편으로 '깨다'에서 온 것이지요. 깨달음은 잠에서 깨어나, 보는 것과 관계되었고, 그것은 깨달을 각(覺)자의 풀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뜬 사람만이 볼 수 있고, 본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진짜 눈을 뜬 사람은 눈을 뜨고 보건, 감고 보건, 보이지 않는 것, 지금은 겨자씨처럼 작지만, 나중에 이것이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깃들이게 된다는 것을 본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깨달음은 (그릇을) '깨는 것'과도 관계됩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깨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선입관이나 편견일 수도, 진리를 깨닫는 자기 자신일 수도, 아니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한 진리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이로써 다석 유영모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보는 것이고, 언제나 '깨고, 깨지는' 과정임을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곳간에는 새 것과 낡은 것이, 진보와 보스, 또 같은 땅에 밀과 가라지가, 한 그물 안에 쓸 만한 물고기와 못쓸 물고기들이 같이 있다는 사실, 현실에 놀라거나, 상처받아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심판 날까지 밀과 가라지를 함께 두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니까요.

그러나 겨자씨처럼 그 어떤 씨보다 더 작지만,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처럼, 조금만 넣어도 가루를 온통 부풀리는 누룩처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내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소망과 기쁨으로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견디는 사람입니다.

김진한 jhkim@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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