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신학자'로 잘 알려진 이정배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와 이은선 세종대학교 교수 내외는 모두 신학자다. 이 전 교수 내외는 스위스 바젤에서 기독교와 유교 간 대화를 공부했다. 이 전 교수는 돌아온 뒤 토착 신학에 천착해 왔다. 감신대 학내분규로 강단을 떠난 뒤 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둔 공동체 구축에 매달리고 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아내인 이 교수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서광선 <베리타스> 회장은 종교간 대화를 주제로 이 전 교수 내외와의 대담을 제안했다. 이 전 교수 내외는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에 지난 17일 서울 종로 5가 모처에서 3시간에 걸쳐 대담을 나눴다. 본지는 대담 내용을 정리해 세 차례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서광선 회장(아래 서 회장) : 이정배 교수를 처음 본 건 40년 전 감신대 강의실에서였다. 그때 미국에서 돌아온지 얼마안된 시점이었는데, 고 변선환 박사가 철학 강의를 부탁했다. 그때 맨 앞자리에 앉아 얌전히 필기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늘 대담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아 훌륭한 신학자가 된 제자와 인터뷰를 하게 됐으니 말이다. 이러려고 오래 살았나 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 전 교수 내외분, 정말 반갑다.
난 일제시대를 살았고,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 와중에 신학했다. 따라서 이런 시각에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정배 전 교수(아래 이 전 교수) : 지금도 서 회장께서 강의하셨던 모습이 생생하다. 하늘 같은 스승이신데도 대담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 회장께서 후배이자 제자를 앞에두고 인터뷰를 하시니 죄송한 마음이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은선 교수(아래 이 교수) : 이화여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는데, 부전공으로 철학을 택했다. 이때 회장님의 <국가론> 강의를 들었다. 서 회장께서 기억을 못하시는 걸 보니 아마 내가 남편만큼은 잘 못했나 보다.(웃음)
서 회장 : 우선 이 전 교수가 강단을 떠나게 된 사연을 묻고 싶다.
이 전 교수 : 서른 둘에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힘들다는 감신대 교수가 돼 30년을 강단에 섰다. 참 긴 기간이었는데, 오래도록 이렇게 교수를 해야하는지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래서 2014년 사직을 결심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연판장을 돌리기까지 하면서 극구 만류했다. 마침 당시는 세월호 참사 이후였는데, 학생들이 지금 학교를 떠나면 세월호를 버린 이준석 선장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또 감신대 학생들이 세월호 참사 특검을 요구하며 세종대왕상을 기습 점거하는 일까지 있었다.
후폭풍은 굉장히 심했다. 그래서 학생들을 지켜야 하겠다는 마음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후 특정 세력들이 학교를 영원히 장악하려고 교수들과 교직원들을 회유하고 심지어 도청까지 했다. 여교수의 경우는 만만해 보였는지 마녀사냥 식으로 쫓아내려 했다.
어느 날, 교수들이 단식농성을 하는 데 학생들이 찾아와 무릎 꿇고 사직을 선언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렇게만 하면 교수와 학생 모두를 지키고 이 싸움에서 승리하겠노라고 했다. 학생들의 바람에 응답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래서 사직을 결심했다. 사실 사직으로 맞선 것이다. 그러나 참 순진했다. 시간이 지나니 투쟁의 동력은 떨어졌고, 학내분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마음이 많이 아프다.
변선환 학장, 기독교-유교 대화 공부할 것 당부해
서 회장 : 할 말을 잃었다. 화제를 돌려보자. 이 전 교수 내외가 스위스 바젤에 가게 된 사연에 대해 말해달라.
이 교수 : 선친께서도 바젤에서 신학을 하셨다. 선친께서는 한국적인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는데 곤란을 겪으셨다. 우주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스위스로 건너갔다. 가기 전 테야르 드 샤르뎅을 감명 깊게 읽었었는데, 이 사람에 대해 공부하겠다고 생각했다.
* 이은선 교수의 선친은 신학자이자 화가, 영성가였던 이신(1927~1981) 목사다. 이 목사는 토착적 교회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전 교수 : 감신대를 77년에 졸업한 뒤 곧장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변선환 학장님의 눈에 들었는데, 스위스 유학을 권하셨다. 변 학장님은 자신은 기독교와 불교를 공부했으니 내겐 기독교와 유교 사이의 대화를 공부하라고 주문하셨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미션'을 준 셈이다. 그래서 난 주자학을, 아내는 양명학을 공부했다.
서 회장 : 오늘 한국의 신학은 민중신학과 토착화 신학의 두 갈래로 나뉜다고 본다. 한 번은 변 학장에게 공개적으로 토착화 신학 전공자들이 민중을 억압하고 학문을 탄압한 군사정권 시절에 왜 목소리를 내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이 전 교수는 토착화 신학을 입에 올리면서도 행동하는 문화 신학자라는 평을 받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 전 교수 : 기독교-유교간 대화를 전공하고 돌아왔는데, 당시는 민중신학의 전성시대라 내 신학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중신학과 토착화 신학의 대화로 학문적 방향을 이끌었다. 서 회장께서 지적하셨듯 저희도 스승 세대에 불만이 많았다. 한 번은 유동식 교수께 ‘60년대 민중신학과 토착화 신학이 같이 생겨났는데, 그 정치적 격변기에 토착화 신학은 (세상에)한 마디 말이 없었느냐?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하고 물었었다.
유 교수의 답변은 이랬다. 일제시대 때 겪었던 설움을 생각하면, 나라를 되찾았으니 우리것 소중함 절절함이 커졌다. 그래서 우리것을 살려내지 못한 경험에서 비롯된 아픔이 민중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작게 보았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변 학장에게도 자연스럽게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답은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해 못할 지점은 없었다. 다행히 변 학장께서는 돌아가실 무렵 한신대 김경재 교수와 자주 교류를 가지셨다. 이 과정에서 해방신학의 모티브로 토착 신앙과 민중신학을 아우르려 했다. 제자들에게도 민중신학과 종교신학 이 두 지평이 합류하는 게 신학의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 2부로 이어집니다.